복종하지 않는 시민, 그리고 지식인의 역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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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양재평 작성일15-08-28 00:03 조회6,864회 댓글3건관련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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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현님의 댓글
김영현 작성일
시험 기간에 해방이 되었다. 일시적인 만족감은 우리에게 '수능'이란 문제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알면서도 모르고 행동하는 것들이 수단과 강요로써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푸코가 지적했듯이 공공 기관과 권력 기관의 행정적인 수동성들은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여전히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이것을 끝낼 방법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자본을 믿고 있는 한 여전히 우리는 권력자들의 놀음에 벗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지성인이라 불릴 수 있는 리영희는 '전환시대의 논리'의 서두에서 벌거 벗은 임금님의 우화의 사례를 듭니다. '옷을 벗었다'는 점을 지적한 어린 아이가 진실을 이야기 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역사'라는 이름 아래 '왕 놀이'라는 놀음을 우리는 몰래 즐기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 폭력을 인식하고 있었다면, (리영희는 라캉의 우화를 알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백화점이나 상점에 들어설 때 점원들의 어색한 웃음 뒤에 숨겨진 유혹과 환상들은 우리의 삶에 저항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최소한 이것을 알기 위해 우리는 교과서의 공부가 아닌 한번 더 문제점에 대해 숙고해 볼 수 있는 사상의 공부가 우선적으로 필요하지 않을까요?
김영현님의 댓글
김영현 작성일
우리는 여기서 자발적 복종의 일차적 근거가 습관이란 사실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말이 길드는 과정과 같다. 말에 재갈을 채우면 처음에는 재갈을 물어뜯다가 나중에는 익숙해져 재갈을 갖고 장난질한다. 말에 안장을 얹으면 처음에는 격렬하게 반항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자신을 짓누르는 무거운 장비와 장신구를 뽐낸다. 『자발적 복종』 p.81
우리는 평생 습관 속에서 훈육과 규율과 함께 아이러니한 공존의 삶을 살아왔다. 옥상 달빛의 '희한한 시대'라는 노래처럼 '자유'란 그저 '통장에 들어있는 19만원처럼' 망각된 기억으로서 남아 있을 뿐이다. '지식인', 정보를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사건에 대해 능률적으로 처리할 수 있는 사람이란 정의 아래에 과연 '지성인'은 어디로 갔는가? 최근 부산대 고현철 교수의 투신 자살 이후로 직선제는 '민주주의'의 보루란 그의 유서처럼 우리가 사유해야 할 점은 '민주주의'라는 이념 그 자체가 아닌가? 단순히 의결 처리와 정치적 사항에 대해 형식적이고 일반적인 투표의 장을 위한 공간이라면 '민주주의'는 '전체주의'와 함께 한다는 역설과 함께 해야 할 것이다. 이번 그리스 사태에 대해서 유럽 의원장과 기자들이 '치프라스'의 자본주의적 보류라는 선택에 대해 경제적 측면과 손실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을 때, 그가 의원직을 사표했다는 점은 상징적이다. 라캉이 프로이트 학교를 설립하고 탈퇴했듯이 자유로운 주체로서의 '윤리'란 바틀비적인 '거부'의 공동의 운동이 함께 해야 한다. 지젝의 말처럼 '자본주의와 민주주의의 결혼은 끝났다!', 여기서 벤야민은 『폭력비판을 위하여』에서 자유와 폭력의 변증법적인 관계에 대해서 놀라운 주장을 제시한다.
자연법이나 실정법 모두가 예상하는 폭력의 전 영역에서 위에서 암시한 것처럼 법적 폭력의 문제성에서 벗어나 있을 폭력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지금까지 세계사적인 존재 상황의 세력권으로부터의 구원이라는 관념은 차치하더라도 인간의 과제들에 대해 어떻게든 생각할 수 있는 해결에 관한 그 어떤 관념도 모든 종류의 폭력을 전적으로, 원칙적으로 배제한 가운데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채로 머물기 때문에 모든 법 이론이 포착하는 폭력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에 대한 물음이 필연적으로 제기된다. 『폭력비판을 위하여』 p.105
칸트의 목적으로서의 수단, 수단으로서의 목적이란 법의 이율배반적인 측면을 벤야민은 칸트를 비틀어 배제된 법의 이중성에 대해서 지적했다. ‘여기가 로도스가, 여기서 뛰어라’라는 헤겔 법철학의 명언처럼 자발적 복종은 ‘자유’를 비틀어서 우리가 배제된 자이며, 공포의 대상이며, 정치라고 선언하는 그날까지 우리는 ‘공부’와 ‘투쟁’이란 실천적이면서도 이론적인 투쟁의 모순 속에서 공허한 희망을 걸어볼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폭력과 함께 했다. 우리가 망각하고 배제된 자들의 ‘죽음’은 늘 여기에 있다. 영화 「위로 공단」속 랑시에르의 몫 없는 자가 여기에 있지 않은가? 우리의 구로 공단의 여성 노동자들은 역사에서 잊혀 졌으며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연속이었다. 이제는 ‘아줌마’라는 억압되고 잔인한 이름 아래에 ‘자본주의’ 체제의 ‘잉여’로서 구조적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살아 있는 자의 책임은 ‘죽음’을 온전히 떠안을 수 있을 때 최소한의 사유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총파업으로서의 ‘일시적인 중지’, 빈-공간의 몫을 우리가 언제쯤 선택할 수 있을까?
유진재님의 댓글
유진재 작성일
안녕하세요. 저는 인디고 연구소에서 공부하고 활동하는 청년 유진재입니다. 재평씨가 올린 문제 중 첫번째 각자의 삶에서 복종하고 있는 건 무엇인가요? 라는 주제에 대해서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오늘날 우리가 우리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고 있는 인지적 구조에 관해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그젯밤, 집으로 가던 길에 고등학교 동창을 만났습니다. 그 친구를 K라고하겠습니다. 예전 시절의 추억부터 오늘날 정치적 현안에 대한 이야기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20대 중반의 K는 자기 입으로 자신은 보수적인 입장을 지지하고 있고, 그런 생각은 군대를 다녀오면서 형성되었다고 말했습니다. <연평해전>을 보며 펑펑 울었다는 그는 저에게 놀라운, 아니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J 기억나?\" \"음.. J면 운동잘하는 친구였던가\" \"운동 진짜 잘했잖아. 우리 학교에서 제일 빨랐지.\" 라고 하면서 듣게되었습니다. J는 사촌형이 특전사였고, 그것을 동경했기에 본인도 특전사에 지원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 구보를 하다가 갑자기 쓰러졌고, 그대로 뇌사상태에 빠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사를 해보니 머리쪽에 타박상의 흔적이 있었는데, 그 전날 밤에 구타가 있었다고 하더군요. K는 말했습니다. \"와, 진짜 너무 불쌍하지 않냐... 어떻게하냐 이제..\" 그리고 이어지는 말이 \"이런 친구들은 외면하면서, 세월호 사건 같은 데에만 시위하고 목소리를 높이고 그러냔 말이야\" 였습니다.
저는 두 가지 당혹감에 빠졌지요. 하나는 동창이었던 친구가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것, 그리고 두 번째는 어째서 친구가 뇌사상태에 빠졌다는 슬픔이 세월호 사건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냐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이걸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걸까.
<연평해전>보고 운다든지, 친구가 군복무 중에 뇌사 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에 충분히 인간적인 감정을 느끼고 슬퍼하며 안타까워 할 줄 아는 마음을 가진 K는 어째서 진보나 시민운동, 정치적 쟁점에 대해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는것일까.
저는 소방서에서 일을 한 적이 있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때였지요. 처음 일주일은 모두 애도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사석'에서는 이제 세월호 얘기좀 그만하라고 했던 싸늘한 시선이 말들이 나왔습니다. 그 말을 했던 분도 사고 현장에서는 누구보다도 헌신적으로 사람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분이었습니다. 어째써 때로는 타인에 대해 공감하고, 연민하고, 그 처지에서 생각하는 사람들이 어떤 사안에 대해서는 외면하고, 분노하고, 빨리 잊어버리려 하는 것일까요.
저는 이것을 현대인의 이기주의라든지 파편화된 인간관계라든지, 자기 이익을 합목적적으로 추구하는 경제인(호모 이코노미쿠스)와 같은 개념으로는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면서 미국의 인지과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프레임'을 떠올렸습니다.
'프레임'이란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형성하는 정신적 구조물\"입니다. 그리고 조지 레이코프가 주장하는 바중 하나는 \"프레임이 사실을 이긴다\"입니다. 뇌 속에 있는 프레임과 사실이 일치하지 않을 때, 사실은 사라지고 프레임만 남는 다는 겁니다. 프레임은 특히 언어에 좌우되는데 예를 들어 '병원'을 떠올려봅겠습니다. 병원이라고 하면 의사, 환자, 문병객, 간호사, 원무과 등을 떠올릴 수 있는데요. 이렇게 말해보겠습니다 \"문병객이 원무과에서 의사를 수술한다\" 이 말을 들으면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각 단어와 그것이 연상시키는 프레임이 다른 단어와의 연결에서 충돌하기 때문이지요. 어쩌면 참 허약한 이 프레임은 사실 우리 일상에서 수많은 오류를 제거하고, 논리를 갖출 수 있게하는 편리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친구의 이야기로 돌아와 마무리하겠습니다. 그 친구에게 '군인'은 '나라를 지키는 숭고한 인간'이라는 프레임이 작동했습니다. 그건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것이죠. 그리고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시위했던 사람들은 '나라의 발전을 저해하는 걸림돌'이라는 프레임이 작동했습니다. 그러므로 군인의 고통에 대해서는 공감했지만, 세월호에 목소리를 높였던 이들에 대해서는 분노한 것이지요. 문제는 그렇게 접근했을때 진실을 제대로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는 것입니다. 군대 내부의 인권 유린으로 발생한 사건도 마치 나라를 위해서 희생당한 것처럼 보이게 되고, 300여명이 한꺼번에 수장된 세월호 참사도 보상금에 눈먼 이기주의와 정권의 반대자로 밖에 보이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날 자발적 복종의 한 형태가 바로 이 지점에 있다고 봅니다. 왜 그런지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는 것입니다. 진정 왜 이런 일이 일어났고, 또 일어나고 있는가. 이것이 또 다시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하는지를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걸 포기하는 것입니다. 생각하는건, 질문하는건 자기가 굳건히 믿고 있던 세계와 프레임이 흔들릴 수 있는 위험한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진실에 다가서려고 노력하기 보단 기존의 프레임에 안주해있는것이 편안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바로 이 지점에 문제의 본질이 있다고 봅니다.
프레임을 깨고 사태의 진실과 마주할 것, 적어도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 혹여나 내가 생각하고 보고 있는 것이 특정 프레임에 갇힌게 아닐까 의심해보는 것. 이것이 자발적 복종을 이겨내기 위한 한 방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