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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맹목적인 믿음에 맞선 예술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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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혜진 작성일13-08-10 19:21 조회910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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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는 여름입니다!
기온이 올라갈수록 여기저기서 선풍기와 에어컨을 트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전력 사용량은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원자력 발전소는 가동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원자력 발전소나 해군기지 등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소들이
여기저기에 생겨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는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라는 안일함과 맹목적인 믿음으로
문제를 애써 외면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후쿠시마 사태 이후 일본을 비롯한 각국의 정부들이 보여준 태도들은
우리의 믿음이 어쩌면 잘못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시대의 문제를 바라볼 수 있을까요?

서경식 선생님은 우리가 '경계에 선 사람들'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그 경계는 시대가 판단하는 옳고 그름, 혹은 선과 악의 기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념에 의한 갈등, 국가 간의 전쟁, 인종차별 등으로 어느 한 쪽은 절대적인 선이고
다른 한 쪽은 악이라는 판단은 우리 인류 역사 속에서 늘 있어왔습니다.

그러나 단순히 피해자의 입장에서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 아니라,
시대가 규정한 선과 악의 경계 자체를 바꾸고 싶어 했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 국가와 공동체 대한 믿음에 생기는 틈새 혹은
시대의 맹목적인 광기를 그 누구보다 객관적인 시각으로 진단하였습니다.

그들의 목소리는 때로 소설 작품으로, 논문으로, 음악으로 표현되곤 합니다.
특히 언어와 문화의 경계를 뛰어 넘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공감을 이끌어내는 예술은
우리에게 더 큰 충격과 깨달음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책 『청춘의 사신』에는 펠릭스 누스바움의 「유대인 증명서를 들고 있는 자화상」라는 작품이 나오는데요.
유대인이 탄압받던 나찌 시대, 유대계 독일인으로서 나찌의 추적을 피해
벨기에에 숨어 지내던 펠릭스 누스바움은 나찌와 벨기에 사이에서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주변인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이 작품에 그려진 유대인의 서늘한 눈빛을 오늘날의 우리가 다시 마주해야 하는 이유는
국가를 벗어난 수많은 사람들, 시대의 아픔을 온몸으로 겪어내는 사람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단순히 '국가는 폭력적이다!'라고 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인종을 포함해 내가 속한 모든 것은 정의롭고 정당하다고 믿고 싶어 하는
우리들에게 의문을 제기하고 있습니다.

국가는 언제나 국민의 편인가?
예술은 언제나 고급스럽고 우아한 것만을 대상으로 삼아야 하는가?
양성애가 동성애보다 더 우월하고 정당한 것인가?
우리 사회에 양 극단의 대립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나는 곳은 어디인가?
우리 시대에 필요한 진짜 '선'이란 무엇인가?

그렇다면 이들와 같이 시대가 정한 '선'과 '악', 혹은 '좋음'과 '나쁨'의 기준에 맞서
새로운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았던 예술가들과 그 작품에 대해 이야기해봅시다.
가난과 고통과 외로움을 견뎌내면서까지 그들이 그 작품을 남기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요?
또한 그의 정신을 이어받아 오늘날 우리는 어떤 사안에 어떤 목소리를 낼 수 있을까요?

댓글목록

정다희님의 댓글

정다희 작성일

예전에 힐링캠프에서 나온 어느작가분이 생각납니다. 황석영 작가님이셨을거에요 나이지긋한 남자분이요. 우리나라는 남과 북으로 나뉘어잇잖아요 그리고 어느쪽이 더옳고 다른쪽은 나쁘다!라는 사상을 나라가 심어주고 국민이 서로를 비난하는것이 좋지못하다고 하셧던거 같아요. 우리는 검정과 흰색의 중간지점인 회색지대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살아야한다고 하셔서 전 감명깊게 봤었습니다. 이때까지 뭐가 옳고 무엇이 그른거지? 하고 살아왔었는데...회색지대라는것이 있을수잇다니 좀 충격이었어요. 이때까지 살았던 시간들이있고 습관이있어서 쉽게 고쳐지진 않겠지만 노력해봐야겠어요, 너무 한쪽으로 치우친 시선이 아닌 회색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볼수 있도록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