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독서회

2017. 9월 4주 독서모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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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민정 작성일17-10-05 11:49 조회195회 댓글4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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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짜: 2017.09.27(수)

● : 악의 해부-나치 전범들의 심리분석

● 저자: 조엘 딤스데일/ 박경선 옮김

● 사회자 : 김민정

● 참석자: 정광모샘, 정비호샘, 손병철샘, 박소연샘, 주묘희샘, 김석화샘, 장병순샘, 마종윤샘,

하천욱샘, 김민호샘, 김민정 – 11

 

1.     저자소개

조엘 딤스데일은 미국의 저명한 정신의학자. 칼레튼대학교에서 생물학을, 스탠퍼드대학교에서 사회학과 의학을 공부했다. 현재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캠퍼스 정신의학과 석좌교수로 있으며, 스트레스, , 삶의 질 등을 연구하고 있다.

2.     책소개

『악의 해부』는 나치의 패망 이후 이루어진 악의 실체에 대한 연구 자료를 토대로 나치의 주요 전범 네 명에 대해 집중적으로 살펴본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성이나 지그문트 바우만이 주목한 관료제와 같은 사회적인 시스템보다 전범들의 심리에 특히 초점을 맞추었고, 전범들을 검사했던 두 학자의 상이한 시각과 악의 원인을 해석하는 데 심리학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3.     독서후기

여느책에 비해 번역이 훌륭하다. 그래서 쉽게 읽을수 있었다. 책제목이 악의 해부지만 악이 어떤이유로 생겨났는지 원인은 찾을수 없다. 다만, 두 학자-켈리, 길버트-의 상이한 해석이 흥미롭다.

켈리는 악은 평범하다 다만 비정상적이고 과도한 욕망, 낮은 윤리기준, 강한 민족주의라는 사회적 맥락에서 발생했다고 보는 반면, 길버트는 악마는 사이코패스라며 일반인과 다른 특수한 악의 범주가 있다고 보고있다.

글쎄이 책을 읽는 수독샘들의 생각은 어떨까?

4.     샘들의 의견

* 나치지도자의 심리분석을 단순한 개인심리로 볼 것이 아니라, 사회문제나 정치문제등 거시적인 안목으로 바라봐야 할것이다.

p. 139 괴링의 법정에서의 답변

당연히 우리가 그런건 맞다. 전쟁중이었으니깐, 이 멍청한 양반아. 당신이라도 별수 없었을 거라고.”

* 선악설, 전쟁중 인간은 생존본능의 욕구가 강해진다.

* 이 책은 악을 1. 악의보편성, 2. 반사회적인 인간 이라는 두 가지로만 구분했지만 4명의 전범만 보더라도 악의 성격은 다양하기 때문에 악을 규정하기는 쉬운 것이 아니다.

* 영화소개:

1. 한나아렌트-악의 평범성, 악의 보편성, 아돌프 아이히만은 관료적인 인간으로 묘사

2. 아이히만쇼-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과정을 그린 이 영화를 보면 사이코패스는 존재하는 것 같다.

3. 나는 부정한다-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의 이야기

* 작가는 시종일관 중립을 유지하며 판단을 유보했다. 악의 이미지라는게 과연 존재할까?

p.246~247 한나아렌트의 악의 평범성

많은 이들이 아이히만과 다르지 않았고, 그들 다수는 변태적이지도 가학적이지도 않았으므로, 결과적으로 그들은 예나 지금이나 끔찍하리만치 너무나도 정상이라는 것. ..

*캘리의 입장도 길버트의 입장도 둘다 일리가 있다.

캘리 주장에 덧붙이기- 가해자, 피해자 그리고 방관자. 방관자는 곧 가해자이다.

길버트 주장에 덧붙이기 생각없음에 대한 성찰, 인간은 수치심과 부끄러움을 안고 살며 끊임없이 자기를 되돌아 봐야한다.

*누구나 악인은 될수 있다. 악의 근원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악을 추종하게 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크다. 악의 발현과 악의 확장성.

*관료제의 위험성- 분업된 업무()은 위험하다. 독일의 나치기록보관소- 기록의 중요성, 일본과 비교됨.

* 저자의 노력이 돋보이는 책(미주의꼼꼼함), 책의 구성도 만족-전범들 이야기뿐만 아니라 길버트와 캘리의 갈등표현, 재판을 둘러싼 다양한 이해관계까지 모조리 소개함.

악의 평범성속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선과 악의 도덕적 개념

악의 씁쓸한 현실; 나치의 악을 재판해서 승전국은 미래의 정당성을 확보하게 되고, 악을 이용하여 정치.문화적인 이득을 챙긴다.

 

5.     마치며..

사회적인 측면: 건강하지 못한 시스템, 부패한 권력속에서 악의 평범성이 발생.

개인적인 측면:사유하는 힘, 이타심이 없는 개인에게 사이코패스라는 특수한 악이 발현할 것이다.

 

내가 세상에서 한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것이 되는 것이다.”

-도스토예프스키

 

댓글목록

김민호님의 댓글

김민호 작성일

술이 돌 듯, 독후의 감들이 한 순배 돌았다. 공교롭게 끄트머리에 앉은 나는 이미 할 말을 꼴은 탓에 달리 할 말이 없었지만, 벌주를 마시듯 마지 못해 이야기를 꺼내 놓아야 했다. 그래서인지 시종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달리 할 말을 찾지 못한 것이 후회스러운 게 아니라 뭔가 반드시 해야할 말을 하지 못한 것같아 비겁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오늘 우린 적어도 ‘악’에 대해 얘기하고자 모인 자리가 아니었던가.

이 석연찮은 기분의 투사일 수도 있겠지만, 오늘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모임 전체가 어떤 모종의 타협을 한 것은 아닌지 의심이 든다. 왜냐하면, 악에 대해 많은 얘기들이 오갔지만 시원하게 마무리를 짓지 못한 기분이 들어서다. 특히, 별다른 감정적 동요 없이 차분하고 태연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간 것이 오히려 내 의심을 짙게 한다.

그게 뭘까? 무엇이 우리를 모종의 타협으로 이끈 걸까. 악에 대한 저자의 탁월한 균형 감각 탓인가. 아니면, 우리 스스로가 이미 악에 충분히 익숙한 탓인가. 실제로 악을 직접 대면하고 목격한 뉘른베르크 재판 관계자들과 한나 아렌트처럼 우리도 직접 악을 대면한 체 오늘 모임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그렇게까지 비겁하거나 한가로울 수 있었을까.

그래서 문득, 사고실험(?) 하나를 제안해 본다. 내가 생각해도 이 실험은 고약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악에 대해 그들이 경험하고, 경악한 것에 대한 생생한 추체험일 수 있다는 점에서 고통스럽지만(!) 사고를 극단으로까지 밀고 나가고자 한다.

오늘 우리는 단순히 독서 모임을 하기 위해 모인 것이 아니었다. 사실, 수요독서회는 이미 2년 전에 해체되었고, 그 해체의 주범을 2년 동안 추적 끝에 잡아다가 심문하는 자리였다. 경제적 이해관계가 전혀 없는 모임이 파탄을 맞는 건 드문 일이지만, 대개의 경우, 모임 자체보단 같이 모임을 하는 인간에 대한 혐오와 회의가 극에 달해 모임 자체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진 결과다. 수요독서회도 그랬다. 회원간의 시기와 질투, 배신과 험담이 극에 달해 도무지 모임을 정상적으로 할 수 없는 상황까지 가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 알고 보니, 이 모든 일이 오직 한 사람의 농간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의 교활함은 회원들을 이간질시키는데 그치지 않았다. 그는 회원들을 한 사람씩 꾀어 돈을 뜯고, 보증을 서게 했으며, 심지어 성적인 추행까지 일삼았다. 그로 인해 어떤 회원은 경제적 궁핍에 몰려 가정이 파탄나고, 가족 중 자살한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회원은 심각한 정신적 장애까지 갖게 되었다.

여기까지 쓰니, 순간 오싹한 기분이 들고, 얼굴이 화끈거린다. 내가 지금 제정신인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이 실험적 상황은 발칙하기 짝이 없다. 어쩌면 이런 상상 자체가 우리 모임에 대한 크나 큰 모욕이자 오늘 참석한 분들에 대한 큰 결례일 수 있다. 나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우리 중 그렇게 악질적이거나 어리석은 누구를 감히 상상할 수 없다. 하지만, 홀로코스트처럼 악은 언제나 우리의 상상을 비웃고, 악은 저 넘어가 아닌 바로 우리 곁에서 숨 쉬고 있기에 그 악과 직면하려면 여기서 멈출 수 없다.

그래서 오늘 모인 우리는 대부분 철저한 피해자이며, 악질적인 가해자 역시 반드시 우리 중 한 사람이어야 한다. 도저히 어느 한 사람을 특정해서 상상하기 힘든가? 너무 고통스러운가? 그렇다면 내가 약간 도움을 드리겠다. 그 악마적 존재를 나, 김민호라고 특정하길 바란다.

자, 이제 사고실험을 이어나가 보자. 비로소 우리는 켈리와 길버트, 한나 아렌트와 비슷한 입장이 되었다. 그들처럼 우리도 구체적인 ‘악’을 직접 마주한 체 오늘 ‘악’에 대해 얘기하게 되었다. 그 어떤 감정적 동요없이 편안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그 놈과 눈이라도 제대로 맞출 수 있을까. 저자처럼 탁월한 균형 감각을 유지하거나, 손쉽게 한쪽 편의 손을 들어줄 수 있을까. ’악의 본질’에 관해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혹은 더 주목할 것은 ‘악의 사회성’이라고 태연하게 얘기할 수 있을까. 더욱이, 그 놈이 우리들의 면전에서 자신을 변호하며,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다고! 혹은 너희들도 똑같은 인간이야! 라고 애원하거나 항변하는 상황이라면….

악을 두고도 결코 순수하지 못했던 뉘른베르크와 예루살렘의 재판이었지만, 허상이 아닌 실체를 두고 이루어진 분명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분명한 실체 때문에 카오스는 더 증폭되고, 악은 더 평범해졌지만, 우리 인간이 자신을 더 깊이 성찰하게 된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인 것 같다.

김민호님의 댓글

김민호 작성일

인간이 선보다 악을 생각할 때 더 반성적 존재가 된다는 점에서 악이 선보다 더 유익한 것 같습니다. 이 날의 자리도 그랬던 것 같아요. 그 자리를 이끌어주신 민정샘께 감사드리며, 후기 이어봅니다.

마종윤님의 댓글

마종윤 작성일

민정샘, 후기 잘 읽었습니다.^^

정광모님의 댓글

정광모 작성일

사회자님, 수고했습니다.
제 소감을 덧붙이면,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소에서 과연 나치 전범의 정신상태를 제대로 분석할 수 있었을까? 괴링과 헤스를 비롯한 전범은 머지않아 교수형에 처해질 사정이었다. 승자인 미국과 소련이 마련한 전범재판소는 비록 나치가 저지른 강제수용소와 같은 참혹한 학살을 감안하더라도 결국 승자가 패자에게 ‘정신이상자’로 낙인찍는 도식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미국이 학살한 몇 백만에서 천만이 넘는 인디언은 누가 책임지는 것일까? 스페인이 학살한 몇 천만일지도 모를 중남미 인디언은 누구 때문인가? 미국과 스페인은 승자의 방패 아래 얼굴을 숨기고 학살에다 역사에 자신들이 흘린 핏자국을 깡그리 지운 증거 인멸이라는 두 가지 죄를 저지른 악인은 아닌가?

  만약 2차 대전에서 독일이 승리해서 미국의 조지 패튼과 맥아더 장군을 전범 재판에 넘겼으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 그 둘은 자신의 승리를 위해 병사를 사지로 몰아넣은 냉혈한이자 출세주의자에 과대망상증 환자로 단죄되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패자는 저주받은 자다. 역사와 학자는 패자를 짓밟고 승자를 찬양하는 유사 이래로 반복해온 제례의 집행자는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