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독서회

2017년 10월 2주 독서모임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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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민호 작성일17-10-23 06:34 조회159회 댓글2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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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날짜: 2017.10.11()
  • : 한국인만 몰랐던 더 큰 대한민국
  • 저자: 이만열(임마누엘 페스트라이쉬) 교수
  • 사회자 : 김민호
  • 참석자: 주묘희샘, 손병철샘, 마종윤샘, 김민정샘, 박소연샘, 하천욱샘, 김민호– 7

 

1. 프롤로그

처음에 참석하신 분이 적어 혹시나 더 오실 분이 있을까 기다리느라 제 시간에 시작하지 못했습니다. 거기다 11월 모임에서 다룰 책에 대해 모두들 관심들을 가지고 얘기하느라 더더욱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이번 책에 대한 회원 샘들의 관심도 적고, 참석도 적어 모임을 조금 일찍 마치기로 미리 정하고 책에 관한 토론을 시작하였습니다. 먼저, 사회자가 이번 책의 전작인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의 서문을 소개하며 저자와 이번 책에 대한 나름의 분석과 내용을 발표하였고, 이어서 참석하신 샘들의 독후감을 돌아가며 나누었고, 책과 관련한, 혹은 전혀 관계 없는 얘기까지도 격없이 자유롭게 나누다가 마쳤습니다. 

 

2. 책소개

이번 책은 4년이란 시간차를 두고 먼저 나왔던 전작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한민국’에 이어 나온 책입니다. 이 책에는 저자 서문이 없어, 저자에게 이 책이 어떤 의미인지, 왜 저자가 한국에 주목하는지를 직접적으로 알 수는 없지만, 전작의 서문을 참고하면 그 대략을 알 수 있습니다. 저자는 일본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에 일대 혁신을 가져다준 에즈라 보겔  교수의 ‘일등 국가 일본: 미국을 위한 교훈’(1979년)에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저자 역시 한국과 관련해 그런 책을 쓰고 싶었고, 한국에 대한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꾸고 싶어 이 책을 쓴 것 같습니다. 바로 저자도 보겔 교수가 쓴 책과 같은 위상의 책을 내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저자가 중국, 일본 다 제쳐 두고 한국에 주목하는 이유는 한국은 유일하게 제국주의를 채택한 적이 없는, 곧 과거 식민지 운영 경험이 없는 조건에서도 오늘날 세계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놀라운 발전을 이루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한국에 관심을 갖고 한국을 연구했는데, 그 발전의 동인이 바로 한국의 정체성에 있음을 저자는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 정체성은 다름아닌 한국의 과거 전통문화임을 자신은 알아차렸는데, 한국인들은 답답하게도 그 점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미국인들의 인식을 바꾸기 전에 먼저 한국인들의 인식부터 깨고자 이 책을 쓴 것처럼 보입니다.  

 

3. 독후감 나누기

- 이번 책을 선정한 이유 중에는 책 제목이 주는 매력도 한 몫 한 것 같다. 하지만, 우리 수독 모임에서 토론하기에는 좀 부족한 책이었지 않나 싶다. 책에 기후변화에 대한 얘기가 많은데, 우리 모임도 한번 기후변화에 대한 책을 선정하여 토론했으면 좋겠다. 우리 후세를 위해…. 

 

- 이 책에서 우리가 보지 못하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외국인의 눈을 통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했다. 그러나, 저자가 지적하는 문제들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문제들이었다. 하지만, 저자가 외국인임에도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정확히 잘 알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하지만, 그 문제에 대한 해답 혹은 결론이 너무 쉽고 단순하여 동문서답하는 느낌이었다. 또 비약이 심하고…. 만약 이대로 미국인들에게 우리 한국이 소개된다면 오히려 우리를 부끄럽게 하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 대한민국의 정체성은 한국의 전통예술에서 찾아져야 한다. 우리의 전통예술은 매우 독창적이고 훌륭하다고 본다. 우리 한국인들은 스스로 자존감이 낮고, 자학(?)하는 경향이 강한데, 자긍심을 회복하려면 우리의 전통 예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문화답사기 관련한 책들을 많이 필요가 있다

 

추석연휴 TV 여행프로그램에서 독일 젊은이들이 여행하면서 우리 한국인들이 보지 못한 보는 장면을 적이 있다. 우리도 여행갈 미리 공부를 많이 하고 떠나야 제대로 여행할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책의 뒷표지 추천사를 노암촘스키가 과연 책을 읽고 추천사를 썼을 의심스럽다. 책에서 저자가 우리 사회의 문제를 지적한 부분에서는 얼굴이 붉혀졌다. 하지만, 논리가 중구난방이고, 저자는 우리 사회에 대해 넓게, 하지만 너무 얇게 알고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했다

 

내용이 피상적인 측면이 있으나, 여러 꼭지들로 나눠져 있고, 내용이 짧아 읽기는 쉬었다. 책의 내용은 우리가 우리 문제를 알아나가는 촉매제 역할을 하지 않나 싶다. 추석 연휴 , 가족이 자동차로 전국 투어를 했는데, 강릉 오죽헌에 갔다가 우리 문화재에 관한 빈약한 소개를 접하고 많이 부끄러웠다. 더불어 우리 고유의 철학사상에 대해 알고 싶다는 욕구도 생겼고, 우리나라의 고유의 콘텐츠는 뭘까하는 의문도 들었다. 저자는 생활 정치를 강조하고 있는데, 일상의 정치에 무관심한 우리의 모습을 꼬집는 같았다

 

4. 에필로그

최근들어 가장 적은 수가 참석한 모임이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덕에 어느 때보다 자유롭고 넉넉한 분위기 속에 진행된 모임이었던 같습니다. 뒷풀이까지 이어진 풍성하고 훈훈한 말의 성찬에서 위로를 받기까지 했습니다. 참석해주신 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샘들의 독후감을 요약 정리하면서 빠진 부분이나 오역한 부분이 있을 있습니다. 그런 점이 있다면 송구하고, 댓글에서 보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목록

마종윤님의 댓글

마종윤 작성일

민호샘, 후기 잘 읽었습니다.^^

김민호님의 댓글

김민호 작성일

얼큰한 취기를 누르고자 편의점에 들러 커피를 샀다. 사실, 취기만이 아니었다. 뒷풀이까지 이어진 열띤 만담(?)의 열기를 식히고자 가던 길을 멈추고 잠시 쉬었다. 야외 테이블 하나를 혼자 점거한 체 농 익어 가는 밤의 정취를 만끽하고 있는데, 갑자기 길 모퉁이에서 애끓는 소리가 들려왔다. “딸아.. “, “딸아..” 하는 것이다. 소리의 진원지는 내쪽에서 보기에 사각지대여서 분명히 확인할 수 없었지만, 이어지는 소리를 들어보니, 사정이 금세 눈에 들어왔다. 술 취해 쓰러진 딸 아이를 엄마란 사람이 애타게 챙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근데 하필, 아이의 이름을 놔두고 딸아, 딸아, 부르는 것이 그 속사정을 더욱 애처롭게 했다.

차마 그 사정을 무심하게 지켜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외간 남자가 불쑥 끼어들 수도 없는 사정이어서 서둘러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그래도 마음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지… 한참을 뒤돌아보며 걸었다. 인사불성이 된 아이를 업고 가면 좋으련만, 이미 훌쩍 커버린 아이에 비해 한참 왜소해 보이는 엄마는 아이를 절반도 부축하지 못한 채 질질 끌며 골목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 때 불현듯 울컥 치받쳐오르는 생각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삶은 참으로 비루하구나!’ 였다.

우리네 삶도 거기서 거기…. 그래서 어쩌면 ‘죽지 못해서 산다’는 말도 절반은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말도 있지만, 돼지가 아닌 이상 우리 인간은 때론 배고픔이나 육체적 고통보다 ‘죽기보다 싫은’ 삶이 주는 비루함에 더 절망하는 존재다. 그런 점에서 우리 인간은 정신적인 존재, 곧 영적인 존재임은 분명한 것 같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인간이 그런 존재임을 증명하는 종교나 예술, 그리고 도덕도 실은 삶의 비루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자기 초월의지에 다름아니다. 바로 육신의 구속을 벗어난 ‘정신으로의 탈주’인 것이다. 삶은 고해요, 비루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그 삶을 초월하려고, 혹은 이겨보려고 말이다.

이렇듯 ‘정신으로의 탈주’는 인간의 자기 연민에서 오는 자기 구원의 행위이건만, 한 개인의 주관적 차원을 넘어 사회적 맥락으로 들어오면, 인간의 초월의지는 한 사회를 지배하는 지배이데올로기로서 기능하게 됨을 역사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모든 종교와 철학, 문화예술이 그랬듯이, 이만열 교수가 추앙해 마지않는 우리나라의 ’선비정신’도 그렇고, ‘효’도 그렇다. 인간의 자기 해방의 의지가 사회라는 틀에서는 되레 현실 억압의 기제로, 개인을 옥죄고 통제하는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고매한 선비정신 때문에 얼마나 많은 여성과 가족이, 그리고 이 민족이 얼마나 오래동안 비루한 삶을 살아야했는지 되돌아보자. 또 ‘효’라는 것이 농경사회 대가족제도의 지배이데올로기였음은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지 않는가. 이를 이만열 교수처럼 단지 문화사적 측면에서 ‘매력과 한계’로만 구분해서 이해할 문제는 아닌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삶의 비루함을 초월하려는 ‘정신으로의 탈주’는 필연적으로 자기모순과 공허함(일종의 비약)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1등 국가’, ‘선진국’이라는 개발논리가 이만열 교수의 자기 가치와 맞는 개념인가? 모든 문제의 결론이 문화적이고 윤리적인 해결로 치닫는 것은 일관성인가 비약인가? 더더욱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그의 국가컨설팅(?)이 너무나 도덕적이라는 데 있다. 여기서 ‘도덕’이란 사회적 통제 기제로서 정죄하고 벌 주기이다. 그가 대안이라고 내놓은 해결책들을 보면, ‘금지’라는 용어가 손쉽게 등장한다. 그의 가치에 맞지 않는 사회적 행위는 모두 금지의 대상이 된다. 심지어 교통법규를 습관적으로 위반하는 자에겐 벌금형 대신 징역형을 선고해야 한다고 말하는 대목에서는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다. 우리가 가장 도덕적인 인간한테서 가장 냉혈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는 건 바로 이 때문이다.

혹자는 어떻게 선비같은 분이 그럴 수 있는가 하겠지만, 내가 보기에.. 바로 선비라서 그렇다. 노동하지 않는 선비라서 그렇다. 발이 땅에 닿지 않고 반쯤 공중에 떠 있어 그렇다. 가끔씩 땅을 보며 걸어가야 하는데 하늘만 보고 걸으니 그렇다. 우리가 육신에 메여 살아도 안되겠지만, 고매한 정신에 홀려 살아도 안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땅만 보고 걷든, 하늘만 보고 걷든 전봇대에 부딪히는 건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참, 뒤를 돌아보고 걸어도 그렀네. 그러니 비록 삶이 비루하더라도 고개 들어(!) 앞을 보고 걸어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