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독서회

12월 4주 수독회 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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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성현정 작성일17-12-31 15:21 조회108회 댓글5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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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 나를 보내지 마 / 가즈오 이시구로, 김남주 옮김 / 민음사

날짜: 2017 12 27 오후 7

장소: 인디고 서원,  에코토피아

참석자 : 김서정, 장병순, 김하정, 손병철, 김민호, 백혜진, 주묘희, 마종윤, 이상민,

         정비호, 이경란, 김석화, 김민정, 박근수, 정종임, 이지현, 박소연, 성현정 

 

때로, 아니 어쩌면 소설은 그 속의 휘몰아치거나 시종일관 저변에 흐르는 어떤 감정 속에 침잠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 역할을 다했다 할 것이다. 그런데 늘 숨겨진 메시지나 구호 등을 찾고 되뇌는 읽기를 많이 해온 나로서는 나를 보내지 마라는 소설이 시원하지 않았다. 그런 마음으로 수독을 진행했다.

우리 독서 모임에서는 사회자가 굳이 토론 방향을 잡거나 전체를 정리해서 이야기해야 할 필요는 없으니 큰 부담은 갖지 않았지만, 후기는 좀 걱정이었다. 역시, 유독 많은 일이 있었던 시기에 가독성은 있으나 내게 흡인력은 적었던 작품이었고, 수독샘들의 이야기도 각자의 개성대로 무궁무진하게 펼쳐져서 후기를 매끈하게 정리하려는 마음은 처음부터 접었다.

 

- 서서히 차오르는 슬픔이 나를 휘감았다. 끝을 읽고 다시 돌아가 처음으로 가니, 처음도 슬펐다.

- 과학과 예술과 인간의 삶에 대한 성찰

- 이 소설을 클론과 인간으로 나누어 읽으면 놓치는 것이 많을 것 같다.

- 그들의 삶이 자신들의 운명에 대해 지나치게 수동적이지 않았나~

- 그들이 저항하지 않은 것은 저항할 수 없었던 것이라 말할 수 있고, 그것이 어쩌면 현실적이기에 아름다웠다.

- 루스에게 공감을 많이 느꼈다.

- 결국 사랑과 예술을 이야기하고자 한 것 같다.

- 소설 속에 영웅과 같은 극단적인 인물은 없다. 모두 주위에서 볼 수 있는 평범하고 유약한 우리들 같은 인물들이다.

- SF를 소재로 삼았지만, 인간의 내면에 침잠하면서 이 구도 속에서 인간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 클론이 감정(자유, 반항...)을 가지는 문제

- 작가는 거의 모든 작품에서 기억의 재현 불가능성에 집착한다. 이 작가의 핵심은 형식이다. 탐정, 역사, SF 등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지만 그냥 이용할 뿐 그 자체가 중요하지는 않다. 그 속에서 정체성에 대한 탐구나, 인간과 예술의 허약함 등을 늘 이야기하려고 시도한다.

 

집으로 돌아와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읽다가 둔 작가의 우리가 고아였을 때를 다시 들었다. 이 작품은 탐정 소설의 형식을 취하지만, 종윤샘의 말대로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역시 연결 고리들을 능숙하게 엮어 기억을 더듬어 이야기를 이어감으로써, 가독성은 높으나 설렁설렁 넘어가는 느낌이랄까... 2차 대전 직전의 중국 이야기가 실감나게 펼쳐지는데 그 시선이 이야기 속에 있지 않고 구경하는 듯한... 그런 느낌들이 내게는 좋지 않았다. 그러다가 소설의 거의 마지막 부분까지 가서, ‘필립 삼촌과 만나 대화하는 장면에서 소설 전체가, 인간의 삶이 가슴 아프게 확 박히는 느낌을 받았다. 예상치 못한 전개라거나 반전이라는 말은 아니다. 알고도 인지하지 못하는, 때로 모른 척 외면하기도 하는 삶의 많은 장면들...을 새삼 한꺼번에 느끼는 아픔이랄까.

문득 나는 나를 보내지 마에서도 생각보다 더 많은 감정들에 싸여있었음을 느꼈다.

지극히 현실적인, 위압감이 흐르는 헤일셤,

루시선생님의 고뇌 아니면 신념? 혼란?,

표면적으로 보이는 루스의 이해하기 힘든 행동들 속에 깃든 불안감과 죽음을 앞에 두고 캐시와 토미를 이어주려는 노력 속에 깃든 마음,

노퍼크 여행에서 각자들의 느낌들,

캐시와 토미의 덤덤한 듯 시리고 아린 관계...

소설 내내 그런 마음들과 함께 했음을 새삼 알아차리며, 공감 가는 옮긴이의 말 한 부분을 소개한다.

 

“...이시구로의 주인공들은 회고담으로 작품을 끌고 나가면서 기억의 불완전성을 십분 활용한다. 작가 브라이언 피니는 이를 두고 기억의 불확실성을 오히려 활용하는 이런 독특한 방식을 통해 저자는 사실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 동의를 구하고 있음을 환기한다. 이시구로의 글쓰기의 특징이 기억이 사실을 감추는, 혹은 언어가 의미를 감추는 지점에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이런 기억과 상상력과 꿈의 혼융을 통해 독자는 사실주의가 단순화해 온 현실의 미궁속으로 발을 들여놓는다...”

                                                               - ‘우리가 고아였을 때옮긴이의 말 중에서

 

 

*메모를 지나치게 단편적으로 한 게 많아 정리 못한 것이 더 많습니다.

댓글로 부족함을 메워주시길 바랍니다.

댓글목록

마종윤님의 댓글

마종윤 작성일

민호샘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아직 문학에 대해 잘 몰라서 그냥 민호샘 글을 웃으며 기분 좋게 읽었습니다. 근데 그게 좋은 것 같아요. 그냥 웃으며 읽는다는 게. 제가 생각하는 문학이라는 게 그런 것이거든요. 읽고 내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 비문학을 읽을 때와 확실히 다르게 마음이 움직이는데 그게 뭔지는 잘 설명은 못하겠네요. ㅎㅎㅎ
어찌되었든 순수한 문학은 존재하지 않고, 주제의식이 없는 문학이 없다는 말에는 공감합니다. 근데 제가 능력이 안 되서 그런지는 몰라도 가즈오 이시구로가 뭘말하고 있는지를 잘 모르겠네요. 그저 매번 비슷한 패턴의 이야기를 조금씩 다르게 하면서 인간에 대해서 말하는 것 같은데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어요. 결국 책을 읽은 독자들이 저마다의 답을 내릴 수밖에 없겠죠. 저는 읽는 사람 마다 무수히 많은 답이 나온다는 게 너무 좋아요. 문학의 구원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자유. 저마다 자기만의 답을 만들 수 있는 그 자유. 그래서 문학을 읽고 또 읽으며 매번 구원의 기회를 가지기 위해 노력중입니다. 문학을 읽고 자유를 누리며 구원의 기회를 얻는 게 저에게는 큰 삶의 힘이 되거든요.
쓰다보니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게 되었는데(^^;;) 어찌되었든 저는 민호샘 의견에 깊이 공감합니다. 그게 민호샘만의 해답이라고 생각해서요. 그걸 읽는 게 즐겁기도 하고요. 아마도 이런 게 문학적인 거겠죠. 민호샘만의 문학. 그걸 읽는 저만의 문학. ㅎㅎㅎ

김민호님의 댓글

김민호 댓글의 댓글 작성일

문학의 구원은 자유에 있다... 종윤샘과 제가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이 커다란 위안이 되는 새해입니다.

김민호님의 댓글

김민호 작성일

나머지 절반을 아직 읽지 못했다. 애는 썼지만 끝내는 읽기 싫어하는 내 내면의 투정을 있는 그대로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 까닭을 탐문할라치면, 유치 찬란한 것에서부터 존재의 이유까지 다양하겠지만, 아이를 달래듯 안아주기로 했다. 그래서 지금부터는 읽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안 읽은 것이다.

모임 때도 스스로 정죄했지만, 적어도 문학 작품은 마지막 문장을 읽지 않고선 얼마를 읽든, 안 읽은 것이나 마찬가지이기에 더 이상 이 작품에 대해서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 작품을 통해 드러난 ‘문학을 대하는 나의 태도’에 대해 깊이 성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글은 그에 관한 소고이다.

감히 말하지만, 이 작품의 최대 결격 사유이자 작품 감상과 독해의 가장 큰 걸림돌은 다름아닌 노벨 문학상이라는 계급장이다. 이는 작가도 반쯤 인정할 것이다. 오죽하면 사르트르 같은 인간은 그 상을 거부했을까. 하지만, 나 같은 일반 독자는 그 계급장이 아니었다면 이 작품을 거들 떠 보지도 않았을 것이며, 평생 만날 일도 없을 것이기에 그것의 명목적 권위와 효용은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문제는 끝까지 노벨문학상 수상작이라는 창을 통해서만 이 작품을 바라보는 것일 게다. 일종의 권위에 대한 추종이자 선입견 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의 올바른(?) 감상과 독해를 위해서는 이 작품의 계급장을 떼고 읽는 것이 누구에게나 절실한데, 사실 그게 쉽지 않다.

나의 오독도 바로 그 지점에서 시작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내 경우는 한번 더 꼬인 셈인데, 그만큼 더 고질적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나는 싸움에 앞서 상대의 계급장을 떼는 데 매우 능숙한 편이다. 그냥 개무시하고 꼴리는 데로 읽는 편이기 때문이다. 근데, 이번 경우는 좀 달랐다. 개무시한다고 했지만, 눈만 감았던 것 같고, 꼴리는 데로 읽는다고 했지만, 내게 익숙한 것만 보고자 했던 것 같다. 이러니 싸움이 제대로 될 수가 있나...

오독의 이유 1

권력으로부터 자유롭고 싶은가, 그대? 그럼, 권력을 알지니... 돈으로부터 해방되고 싶은가, 그대? 그럼, 돈을 알지니... 계급장을 떼고 싶은가, 나? 그럼, 눈을 감을 게 아니라 계급장에 대해 더 확실히 알았어야지. 바보야!... 그렇다. ‘개무시’의 경지는 아무나 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이다.

노벨상에 대한 이런 저런 비판이 많지만, 적어도 노벨문학상 만큼은 아직 속단할 수 없을 것 같다. 작년 수상자가 누군가. 팝가수 밥 딜런이 아니었나!.. 그의 수상 소식 자체가 세계 문학계의 뒷통수를 야무지게 후려치는 일대 파란이었지만, 시큰둥한 그의 반응에 세계 문학계가 벙어리 냉가슴 앓듯 해야 했던 게 기억난다. 어디 작년뿐인가. 그 전 해는 논픽션 구술문학 작가에게 그 영예가 돌아갔다. 이 또한 파격이었다. 그렇게 둘만 비교해봐도, 노벨문학상의 널뛰기 수준이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가?

‘문학이니까 가능하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문학적 상상력으로 보면, ‘형식’ 따위는 가소로운 것이 맞다. 장르도 우습다. 장르만 우습나? 이념이나 역사 또한 개무시할 수 있는 게 문학적 상상력이다. 그런 점에서 여러 노벨상 분야 중 그나마 노벨상다운 것은 역시 문학상 밖에 없는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선정에 있어 해당 분야의 상상력을 최대한 발휘하는 상이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또 어디로 튄 결과일까? 적어도 이 작품에 대해서라면, 유구무언해야 할 처지이기에  약속대로 일절 토 달지 않겠다. 다만, 추축컨대..^^ 문학적 상상력도 절대 개무시할 수 없는 지점에 이 작품이 놓여 있는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게 뭘까? 힌트는 역시 지금까지 발표된 역대 수상작 선정 이유에서 찾을 수밖에 없는데, 내가 보기에 그건 아마 ‘인간에 대한 끝없는 탐문’이지 싶다.

이를 어떤 이는 ‘사실주의가 단순화해 온 현실의 미궁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다’고 표현했는데(위의 현정샘 후기에서 옮긴이의 말 중..), 참 적절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다만, ‘현실’의 미궁이 아니라, 정확하게 표현하면 ‘인간’의 미궁인 것이다.

오독의 이유 2

나는 왜 이 작품을 꼴리는 데로 읽지 못했나? 자유롭게 즐기면서 말이다. 이 작품은 논문이 아니라 문학이지 않는가!... 문학!!... 이는 내게 익숙한 것, 불편한 것들을 작품에 투사하면서 읽었다는 소리다. 물론 이런 짓거리에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인간은 이 세상에 없다. 다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듣고, 그리고 기억하고 싶은 것만 기억하는 게 인간이니까.

심리학, 특히 뇌과학이 발달할수록 이런 인간의 민낯은 점점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뇌의 진화에 종속된 인간의 지각과 인지, ‘프레임’에 갇힌 인간의 감정과 사유 등이 그렇다. 그래서 독자는 소설이라는 문학 작품을 보면서도 자기 예언을 일삼고, 끝내는 자기 충족적 예언의 결말로 작품을 판단하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내가 그랬던 것 같다. 선지자도 아니면서 생명의 존엄에 대한 자기 예언을 앞세워 작품의 주제의식을 먼저 평가하려 했으니 말이다. 적어도 문학은 그 무한대의 상상력을 고려할 때, 충분히 열어 놓고 독해해야 마땅하거늘 난 그렇지 못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참혹하다. 바로 작품이 선물하는 찐한 감동을 좀처럼 맛볼 수 없다는 점이다. 문학 작품을 접한 독자로서 이보다 더 참혹한 결과가 어디 있는가.

그런데, 잠깐!... 이 과정에서 내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어떤 문학은 순수하다는 얘기다. 난 ‘순수 문학’이라는 말 자체를 인정하지 않지만, 이 작품의 경우, 주제 의식 혹은 메시지가 없다거나, 그런 게 중요하지 않다거나, 그런 게 없는 것이 이 작품의 매력이라는 말 따위와는 절대 타협할 수 없다.

내가 이 작품을 한 자도 읽지 않았어도 나는 단언할 수 있다. 이 작품은 결코 순수하지 않다고! 이 작품에는 분명한 주제의식이 있다고! 이 작품은 단연코 정치적이라고!... 말이다. 왜냐하면, 이는 모든 예술에도 일치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게 그렇다. 인간은 태어나자마자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는 존재이며, 인과의 사슬에, 의미의 사슬에 얽힐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과연 그런 존재가 순수할 수 있을까. 해 아래 새 것이 없나니... ‘순수’는 이데아일 뿐 실체가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럼에도 현실에서 잘 쓰인다. 어떨 때? 사기 치거나 개수작 부릴 때 정말 잘 쓰이는 개념이 ‘순수’이다.

이 작품이 정치적이라는 말과 그 정치성을 규정하는 작업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한다. 순수하지 않다고 해서 모든 게 쓰레기가 되는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그래서 내 오독의 두 번째 이유는 명확하다. 작품의 정치성을 섣불리 규정하려 들었다는 점이다.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고, 되레 투사하면서... 그리고 그 작업은 때론 불가능할 정도로 난해하며, 끝까지 유보될 수 있는 문제라는 점도 잊었던 것 같다. 적어도 인간을 탐문하는 문학에서는 말이다.

김민호님의 댓글

김민호 작성일

역시 문학 작품엔 성현샘의 사회가 어울리는 것 같아요. 올리신 후기도 좋고...^^ 그 모든 수고에 감사드리며, 후기 이어봅니다.

마종윤님의 댓글

마종윤 작성일

맞습니다. <우리가 고아였을 때>에서 필립 삼촌과의 대화를 읽다보면 무언가가 가슴 속으로 밀려 들어오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삶의 서글픔이라든지 삶의 진실이 전해주는 삶의 슬픔 같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즈오 이시구로는 어쩌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를 전하기 위해 소설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저의 추측에 불과하지만. 현정샘의 글을 읽고 보니 제가 쓴 <우리가 고아였을 때> 리뷰를 올려봐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족한 글이지만 제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책을 읽을 때 느낀 감정들을 나름대로 정리한 글이라서 샘들에게 미약한 도움이나마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