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독서회

2월 4주 도서모임 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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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주묘희 작성일18-02-20 21:27 조회483회 댓글1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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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하인리히 뵐/김연수 옮김/믿음사

시간: 228일 오후 7

장소: 에코토피아 

“1972년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 하인리히 뵐의 문제작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발표한 지 6주 만에 15만 부가 팔리고 뉴저먼시네마의 기수 폴커 슐렌도르프에 의해 영화화되어 크게 흥행했던 소설로, 현재까지도 언론의 폐해를 다룰 때 언제나 인용되는 고전이다.

 

댓글목록

김양희님의 댓글

김양희 작성일

참석합니다~~^^

백혜진님의 댓글

백혜진 작성일

참석합니다 ^^

손병철님의 댓글

손병철 작성일

참석합니다.

김민호님의 댓글

김민호 작성일

1. 독서는 놀랍게도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와 유사하다. 처음에 ‘보는 맛’이 있어야 하고, ‘씸는 맛’에서 ‘입맛’까지, 아니 소화되어 몸에 좋은 맛까지 있어야 제대로된 독서다. 그런 점에서 ‘책은 마음의 양식'이라는 말은 참 적절한 표현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맛이란 게 워낙 주관적이어서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많지만, 그럼에도 소문난 맛집이 있고, 음식 솜씨를 알아주는 걸 보면 맛에도 기준과 평균이 있는 것 같다.

그럼, 이 책의 맛은 어떤까? 먼저 ‘보는 맛’은 있다. 가볍고 경쾌하다. 입맛을 돋구는 앙증맞은 에피타이져 같다(생뚱맞은, 그래서 성의 없는 표지 사진을 제외하면 말이다). 다음 ‘씸는 맛’은 어떤가. 완전 반전이다. 돌을 씸는 기분이랄까. 무슨 암호같은 독일어 이름과 보고서식 수사, 그리고 회상법 따위가 인정사정 없이 독해를 방해한다. 그런데 침에 개워 한참 씸다보면 입안에서 묘한 향기가 난다. 생선알처럼 톡톡 터지는 유머에, 사탕처럼 깨물어 시원히 부숴 먹는 맛도 있다. 하지만, 다 먹어보면 알게 된다. ‘냉면인 줄 알고 먹었더니 밀면이더라’처럼 이 책은 내가 익히 알고 있던 그런 맛이 아니었다. 즉,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니었던 것이다. 소설임을 부정하는 소설!... 그럼, 이 맛을 어쩌란 말이냐. 난감하다..

2. 이상의 맛타령을 저자, 하인리히 뵐이 듣는다면,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하지 말라고 당장 면박을 줄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저자는 이 책의 평가항목을 직접 후기에 적시했기 때문이다. 얄짤없다!(미리 말해두지만, 난 앞으로 이 표현을 자주 쓸 것이다.) 이미 작품에서 드러난 저자의 이 더러운 성질(?)을 진작에 알아봤어야 했다. 소설을 써놓고도 굳이 이건 소설이 아니라고 우길 정도이니 더 말해 무엇하리... 그렇다면, 하는 수없이 저자가 제시한 평가항목에 차례대로 체크해 나가는 수밖에...

먼저, 제목을 보자. 처음에 나는 ‘명예’라는 거창한 말이 있어, 카타리나 블룸이라는 사람이 제법 지체 높으신 양반인줄 알았다. 그런데 일개 가정부네? <차이퉁>지의 표현대로 하자면, 그 주제에 잃어버릴 명예라도 있나 싶어 처음에는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한글 제목을 달 때, 좀 있어 보이려고 의역을 했나 싶어 독일어 원제목까지 확인하니 얄짤없는 직역이다.

그래서 묻지 않을 수 없다. 저자는 왜 이 헛점 많은 단어를 굳이 사용했을까. 또 그 많은 명예로운(?) 직업들을 다 제쳐 두고 왜 하필 가정부한테서 그것을 찾으려고 했을까(원래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던 사건의 주인공은 교수였다). 생각할수록 너무 재밌다.^^

두번째 항목, 부제를 보자. 폭력의 메커니즘에 대한 제법 학구적인 질문처럼 보이지만, 이 책을 통틀어 이 책과 가장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다. 한마디로 저자의 그 더러운 성질(?)과 도저히 매칭이 안된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저자는 왜 이렇게 긴 부제를 굳이 달았을까. 긴 소설도 아니면서... 정말 생각할수록 너무 재밌다.^^

사실, 세번째가 압권이다. 가만히 보면, 어디서 많이 본 문구이다. 사회적 논란이 예상되는, 그래서 타인의 명예와 관련한 소송에 휘말릴 것 같은 시사 작품이나 역사물(특히 영화)를 볼 때, 첫 장면에 앞서 심심찮게 보게 되는 ‘면피용 문구’가 이 작품에도 있다. 그런데, 표현이 절묘하다. 아니, 다시 한번 말하지만, 얄짤없다!.. 실제와의 유사점이 의도한 바도, 우연의 산물도 아닌, 그저 ‘불가피한 일’일 뿐이라니!!... 정말이지 피도 눈물도, 인정사정도 없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소설이라면 이럴 수가 없다. 이렇게 사심이 듬뿍 담긴 작품을 어떻게 소설이라 할 수 있겠는가! 정말이지 생각할수록 너무 재밌다!

김민호님의 댓글

김민호 댓글의 댓글 작성일

참고: 음식 따위를 입에 넣고 윗니와 아랫니로 깨물어 먹는 행위를 가리키는 동사의 어간이 본 게시판에 금지단어로 등록되어 있어 '씸다'로 수정하여 댓글을 올렸습니다.

김석화님의 댓글

김석화 작성일

참석합니다

하늬바람님의 댓글

하늬바람 작성일

참석합니다

정종임님의 댓글

정종임 작성일

참석합니다

마종윤님의 댓글

마종윤 작성일

참석합니다.^^

김금옥님의 댓글

김금옥 작성일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 / 하인리히 뵐 / 김연수 옮김 / 민음사

명예란 사전적 의미로 ‘널리 인정받아 얻은 좋은 평판이나 이름’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그의 가면 뒤에 있는 ‘신성한 것’에 대해 경의를 표할 때 그 사람은 얼굴을 갖게 된다.(김현경, <사람장소환대>,90쪽)”고 할 때 명예는 그 ‘얼굴’이 수행해 온 긴 시간을 내포하고 있을 수밖에 없다. 주위관계로부터 인정받고 좋은 평판을 쌓아 가는 신뢰는 짧은 시간내에 이루어지지 않기에 일관되게 구축한 모습을 한순간에 무너뜨리는 일은 당사자에게  내외적으로 폭력적인 사건이다. 명예를 잃어버린 카타리나의 행동은 사회적 추락이겠지만 마음만은 ‘텅빈 충만’으로 가득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그래 거의 경외에 가까운 존중 혹은 그 이상, 그녀의, 그렇다, 빌어먹을 그녀의 순수함에 대한 사랑 가득한 경외심이었을 것이고(90)’

‘그녀가 그를 전혀 매력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도 그는 모욕감을 느꼈을 거라고 한다....그녀가 슈트로입레더 같은 사람을, 그러니까 부유할 뿐만 아니라 정계나 재계,학계에서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매력 때문에 영화배우만큼 유명한 사람을 거부한다고 하면, 누가 그녀의 말을 믿어 주겠는가? 그녀 같은 가정부가 영화배우 같은 사람을 거절한다고 하면, 그것도 윤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취향을 이유로 거절한다면 누가 그녀의 말을 믿겠는가? (112)’

쓰여진 것 너머를 상상하고 읽어내기를 강조하는 김진영 선생의 독법은 아주 흥미롭다.
오래전 선생의 강의를 통해 만난 ‘카타리나’의 성격은 위 문장에서도 잘 드러난다.
여러 면에서 불운했지만 당당하게 자기 삶을  꾸려가는 자존감 높은 카타리나! 스스로 보살필 줄 알고, 자신의 취향을 정확하게 인식하고 있는 충실하고 자긍심에 찬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내게 있어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강의내용을 벗어나 읽기가 어렵기에 김진영 선생님 강의 내용을 참고삼아 메모했다.

*하인리히 뵐
독일 전후사 이야기를 많이 쓴 하인리히 뵐은 74년 솔제니친이 추방되었을 때 자신의 집에 묵게 하는 등 작가의 정치성, 사회참여를 거론한 작가다. 1970년대의 독일사회의 구체적 정념성은 무엇인가, 중산층이 가지고 있는 정념의 문제를 비판하고 있다.

68년 서구 유럽 등지에서 커다란 학생운동, 기득권층과의 투쟁, 테러 등 히인리이 뵐이 찬동입장은 아니었지만 사회의 일방적 매도에 대해, 미디어의 비중립성에 비판적 의견을 가졌다. ‘붉은여단’ 주도세력의 테러가 확실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과대포장, 마녀사냥식 일방적 매도∙ 미디어의 선정적 보도에 비판적이었다. 대중들은 맹목적 정념에 쏠려 있었기에 뵐도 비판받았다.

<빌더 차일퉁> 이미지 신문으로 화보가 엄청 많고 주간지로 엄청 큰 활자로 독자들이 많고, 가장 많이 보는 신문, 공정보도, 의미나 이런 것들이 아니라 들뜨게 만들고 극우파적인 성격, 스캔들을 많이 다루며, 스포츠, 성공신화, 눈물 짜게 만드는 기사, 사회 속에서 형성된 집단증오를 부추기는 역할을 함.

*소설속 미이어 문제/세대간 갈등.
개인의 명예와 개인이 어떻게 미디어에 의해 명예를 박탈당하게 되는가, 이 살인사건을 차일퉁은 어떻게 다루는가 문제.
미디어의 선정성, 폭력을 통해 독일 당대 1970년 사회성을 표현.
라인강의 기적으로 엄청난 풍요사회를 이루는 과정에서, 경제부흥의 결과로서 얻어진 풍요한 삶이 어떠한 타락상을 지니고 있는가. 삶의 질에서 도덕, 인간, 윤리 등 인간의 근대성의 고유한 가치가 땅에 떨어져 있는가를 알 수 있다.
오로지 자본주의적 가치만 있는, 맹목적으로 매여 있는 자본주의적 가치는 정념의 타락을 가지고 있다는 것.

*무엇 때문에 차일퉁은 카타리나의 명예를 없애버리려고 하나?
 니체가 이야기하는 레셍띠망 즉 복수심에 있다. 카타리나의 고유한 명예, 순수한 은밀함, 다정함, 정의로움을 미워하는 것이다. 자기들도 갖고 싶었으나 다른 것을 갖기 위해 내다버린 ‘그것’을 가진 카타리나, 너무도 귀한 것을 스스로 더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기에 스스로를 ‘증오’한다. 그들은 희생자를 필요로 한다. 지기를 미워하고 공격해야 하는데 자기를 미워할 수 없기에 타자, 희생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기들이 얼마나 타락했고 가엾은 존재인가를 확인하게 하는 카타리나에게 ‘복수’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복수 심리는 ‘자기’를 향한 것이다. 집단증오∙자기미움이 있는 사회, 이러한 삶을 강요받고 있고 여기에 일조하는 것이 미디어다. 근본적으로 그 당시 독일사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1970년대 독일 사회를 이야기하지만 현재 우리사회 이야기이기도 하다는 것.

마침 오늘자 신문에 김현경 선생의 ‘명예’에 관한 글이 있네요~~
<세상읽기, 2018.02.22 한겨레>
성폭력과 명예

...문제는 법이 정조라는 관념을 버린 뒤에도 사회적으로 여전히 이 관념이 남아 있다는 것이다. 여성에게는 여전히 남성에게는 없는 특수한 명예가 있다고 여겨진다. 합의에 의해 성관계를 가졌는데도 여자들이 언제나 더 쉽게 상처받는 것은 그 때문이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이용한 성범죄의 공론화가 명예형의 성격을 띠는 것을 우리는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은 사실 근대 형법 정신과 충돌한다. 미투 운동에서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은 재판정에 서기도 전에 사회적으로 ‘성범죄자’라는 낙인이 찍힌다. 이것은 무죄추정의 원칙에 어긋난다. 게다가 이 낙인은 법적으로 처벌을 받은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다. 어째서 우리는 성범죄에 있어서만큼은 이러한 낙인이 필요하다고 믿는 것일까? 이것은 성폭력이 본질적으로 명예에 대한 범죄라는 사실과 분명히 관련이 있다. 미투 운동을 통해서 여성들은 부적절한 성행위가 여성의 명예뿐 아니라 남성의 명예 역시 손상시킬 수 있음을 알리려 한다.
트위터와 명예형의 결합은 낯설어 보이고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여성에게 가해지는 상징폭력을 법이 효과적으로 막아주지 못하는 현실에서, 여성들은 당분간 이런 형식의 투쟁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박소연님의 댓글

박소연 작성일

참석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