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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기를 추모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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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민호 작성일18-03-11 23:42 조회471회 댓글1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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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민기를 추모하며.

 

나는 지금 아무도 애도하지 않는 죽음을 추모하려고 한다.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서 말이다. 표현의 자유가 보장된 이 땅에서도 글쓰기란 여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이제는 법이 아닌 사람이 더 무섭다. 내 앞을 가로막고서 검문을 일삼는 나 자신까지 포함해서. 솔직히 그 전보다 더 떨린다. 이번엔 젠더 구분 없이 만인의 공분을 살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글이란 계속 써져야 할 자유다!

 

나 역시 그의 죽음을 애도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로 추모할 뿐이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는 그의 죽음을 기억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기억해야 하는가? 내가 보기에 그의 죽음은 명백히 사회적 타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죽음에 우리도 책임이 있다는 뜻인데. 물론 사람들 대부분이 이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적의를 드러낼 것이다. 혹은 살기까지.

 

하지만, 나는 물러서고 싶지 않다. ‘모든 자살은 사회적 타살이다라는 뒤르켕의 일반 명제를 끌어오지 않더라도, 그가 죽기 전에 사회적 공인으로서 사회적 지탄을 받았고, 그것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팩트가 그 명백한 증거다. 그런데 사실, 이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다. 죽은 그를 부검하지 않았듯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죽음의 양식이나 원인이 아니라 그 죽음의 사회적 의미이다.

 

우선, 죽을 이유가 없는 그의 죽음이 나는 안타깝다. 그 어떤 인간에게도 그가 죽어야 할 사회적 이유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는 내가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이유기도 하다. 대신, 그는 비난을 감내하며 오래도록 살았어야 했다. 피해자가 용서하고, 사회가 잊을 때까지 주홍글씨를 붙인 채 살았어야 옳았다. 그것이 진정 용서를 구하고 사회적 책임을 지는 일임에도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것이 죽기보다 싫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은 명백히 '저항'인 것이다. 죽을 만큼 괴롭고 힘들었을 것이다. 어쩌면 죗값을 치르겠다는 심정으로 죽음을 택한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가 의도했든 안 했든, 그의 죽음이 사회적으로 얼마 남아 있지 않은 그의 명예를 구했다는 점(그의 죽음이 사람들의 침묵과 동정을 끌어낸다는 점)에서 그 죽음의 사회적 의미는 '저항'인 것이다.

 

그리고, 그도 죽기 전에 알았을 것이다. 이 문제가 젠더의 문제이자 인습과 관행의 문제임에도, 그래서 동료 교수도 자기만큼 했음에도 유독 자신에게만 비수가 날아들었다는 느낌도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죽음에는 억울함도 묻어 있다. 내가 진실로 추모하고자 하는 점이 바로 이 점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그의 죽음을 억울하게 만들고 있다. 이 대목은 잘 읽어야 한다. 그가 억울하게 죽었다는 게 아니다. 현재 미투 운동에 대한 사회적 시각이 그의 죽음을 억울하게 보게 한다는 점이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 폭로와 고백은 계속되고, 문제는 사회 전 분야로 확산되고 있지만, 그리고 성폭력의 본질이 권력의 문제임을 사회 전체가 목격하고 있지만, 고백은 여전히 여성의 몫이며, 문제는 권력을 가졌던 한 남자, 한 남자에게만 집중될 뿐이다.

 

그래서 미투는 엄청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가십거리가 되고, '공작'으로 팔리기도 하고, 수컷들에겐 처세의 지침이 되고 있다. 공동정범인 남성들의 양심선언이나 자백은 고사하고, 자살(조민기), 자진 출두(안희정), 자진 사퇴(민병두), 혹은 '언어가 다 떠났다'는 말(고은)로 가해자들의 저항만 횡행하는 현실.

 

, 여성들은 남성 일반을 향해 창을 들지 않는가!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할까 두려워서인가. 아니면, 젠더의 연대를 꿈꾸는가. 우습다. 내가 보기엔, 여기에 여성 일반이 가진 커다란 착각이 숨겨져 있다. 내 남자, 내 아버지, 혹은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신부와 같은 양심적 종교인과 지식인은 다를 것이라는 착각 말이다.

 

특히, 안희정의 배신에 있어 여성과 남성의 반응이 결코 똑같지 않다는 것을 나는 이 대목에서 꼭 언급하고 싶다. 같은 배신이지만, 여성은 그의 가증스러움에 치를 떨었다면, 남성은 자신과의 동일시에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는 사실이다. ‘저놈도 결국 나와 똑같은 놈이었구나!’ 하는 배신감은 곧 수치심으로, 이어 분노로 자신의 공격성을 정당화하는 것이 남자라는 사실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염려하는 의식 있는(?) 여성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여전히 우리는 남성의 지지가 아닌 시민의 지지를 요구할 뿐이라고 주장할 수 있다. 그렇다면, 한 가지만 당부하자. 그런 시민(남성)을 만난다면, 그로 하여금 나는 언제든지 당신을 덮칠 수 있는 가해자의 속성을 지니고 있소라는 자백을 하게 하고서 연대하길 바란다.

 

너무 지나친 언사인가? 그래서 불편한가. 기왕 맞아 죽기로 작정한 이상, 다음과 같은 과도한 일반화의 진리(결코, 오류가 아니다!)를 소개하고서 맞도록 하겠다.

 

나는 아무리 생각을 고쳐먹어도, ‘남자들은 모두 바보이다라는 확신을 버릴 수가 없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다. ‘남자들은 여자를 바보로 생각하기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많은 여자들이 남자들을 바보로 생각하지 않으니까그렇다.

 

말장난 같은가.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이건 진리다. 생각만이 아니다. 인류 역사의 모든 불행한 사건과 권력의 관계를 통계적으로 분석해 보라. 그 관계에서 성별이라는 변수만큼 설명력(인과성)이 높은 변수는 정말 찾기 힘들다. 모계사회였던 원시사회를 제외하고 지금껏 전쟁과 파괴, 차별과 폭력으로 점철되었던 인류 역사와 그것을 결정했던 권력, 그 권력에 누가 있었는지 따져보잔 말이다.

 

, 여성의 적은 여성이라고 하지 않던가. 리베카 솔닛은 남자는 자꾸 여자를 가르치려 든다고 했지만, 그건 잘난 척하는 것이고, 진실로 여성을 가르치는 건 남자가 아니라 바로 여성이지 않은가.

 

나는 남자로서 진정으로 바란다. 오늘날 미투 운동으로 우리 사회의 남성성이 뿌리째 갈아 엎어지기를. 그래서, 나를 비롯한 모든 남자가 사회적으로 거세당하길 진심으로 바란다. 이로써 내게 짊어진 남자의 굴레를 벗을 수만 있다면 원이 없겠다.

 

젊었을 때 아무도 미워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읽고 흔들렸다.

나이 들어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자의 죽음을 보고 또 흔들리는 나는 꼰대인가 철없는 몽상가인가.

 

이제 맞을 일만 남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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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금옥님의 댓글

김금옥 작성일

“...맞을 일만 남았을 수”라는 생각을 표현하는 자체가 민호샘의 용기? 만용?
이렇게 자신의 의견을 내는 자체가 당연한데도 지금껏 사회 곳곳서 고통의 신음을 표현하지도 못한 것이 잘못된 권력주의적 탐욕에 있었음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저는 ‘조민기’를 추모하지 않습니다. 다만 측은지심을 가질 뿐입니다. 그리고 남겨진 가족과 고통 속의 사람들을 애도합니다.
우리 사회는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맞은 것입니다. 숨죽여 말하지 못한 자들의 고통과 회한을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겨우 표현하는 것이 한 움큼의 ‘비명’일지라도 그런 사람이 있음을 아는 것이 시작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민호샘은 맞아 줄을 일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