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고 러브레터

letter 54. 꿈이 좌절되면 갈망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재회가 불가능하면 그리움이 그 자리를 메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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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9-27 13:03 조회3,707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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쉰네 번째 인디고 러브레터


꿈이 좌절되면 갈망이 그 자리를 메우고
회가 불가능하면 그리움이 그 자리를 메우지

이윤영(인디고잉 편집장) 

분노는 언제 집단적으로 결집되는 것일까요? 
사회 변혁은 어느 지점에서 촉발되는 것일까요? 
요즘 제게 가장 큰 화두입니다. 
하루하루 참을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소식들로 가득한 뉴스를 볼 때면 
실망을 넘어 절망을 느낍니다. 
이 모든 것이 현실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기도 하지요.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도록 
진실에 가닿기는커녕 그와 관련한 논쟁을 치졸하고 낭비적인 것으로 
자꾸만 비껴가도록 하는 이 사회에 과연 희망이 있을 수 있는가, 
기대하기 쉽지 않은 일입니다. 

말씀드리기도 부끄럽지만, 
저도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는 단식 시위에 이틀간 동참하였습니다.
‘유민 아빠’ 김영오 씨의 단식이 44일째 이어져 오던 날이었고, 
그를 방해하는 ‘폭식 투쟁’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습니다.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누군가의 표현처럼 단식에 동참하지 않는 것이 더 고통스러웠습니다. 
단식을 고작 이틀 했지만 그래도 느낀 바가 있다면, 
고통을 공감하는 데 있어 그를 직접 경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차이는 엄청나다는 것이었습니다. 
배고픔 그 자체는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짧은 기간이었지만, 
단식은 단지 배고픔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지요. 
단식한다는 것은 음식을 먹으며 느끼는 행복, 
그리고 식사하는 동안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의 기쁨 등을 포기한다는 것, 
즉 인간 삶을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을 걸고 투쟁하는 것이었습니다. 
깊은 간절함 없이 의지 정도만으로는 절대 불가능한 일임을 알게 되었지요. 
단식을 해보기 전은 “유민 아빠는 어떻게 40일 넘게 단식을 하시지?”라는 짐작이라면, 
단식 후는 “유민 아빠의 자식 잃은 고통은 도대체 얼마만큼인 것인가!”라는 이해에 가깝습니다. 
모든 고통을 겪어서 공감할 수는 없으니, 
짐작할 수도 없는 고통의 크기에 우리가 겸손해져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지점에 있다는 것을 통감했지요.      

여기 한 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조금 길지만 그대로 옮겨볼까 합니다.

우리 시대의 어리석음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말 그대로 세계 최고最高의 전쟁터인 시아첸 빙하의 사연일 것이다. 
이곳에서는 인도와 파키스탄 군인 수천 명이 
살을 에는 바람과 영하 40도의 강추위를 견디고 있다. 
사망자 수백 명 중 상당수가 어처구니없게도 단지 추위 때문에 죽었다. 
빙하는 포탄 껍데기, 연료통, 피켈, 낡은 군화, 천막, 
병사들이 내놓은 온갖 쓰레기 등 전쟁의 잔해로 가득 찬 쓰레기 매립지로 바뀌었다. 
영하의 온도에 고스란히 보존된 쓰레기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그대로 보여주는 기념비다. 
인도와 파키스탄 정부가 무기 보급과 고지대 병참 활동에 수십억을 쏟아붓는 사이, 
빙하가 녹기 시작했다. 
지금은 크기가 그 절반까지 줄어들었다. 
빙하가 녹는 진짜 원인은 군사 대치가 아니라 
머나먼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는 선량한 사람들 때문이다. 
평화, 표현의 자유, 인권을 믿는 선량한 사람들 말이다. 
선진 민주주의를 자랑하는 이들의 정부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를 꿰차고 앉았으며, 
이들의 경제는 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나라에 전쟁무기를 수출하는 일에 크게 의존한다. 
빙하가 녹으면 인도 대륙에 엄청난 홍수와 심각한 가뭄이 닥쳐 수백만 명이 고통받을 것이다. 
그러면 싸울 이유가 더 많아 지겠지. 무기도 더 많이 필요할 테고. 
어쩌면 이런 식의 소비 덕분에 세계가 지금의 불황을 이겨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되면 선진 민주주의 국가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의 질은 높아질 것이고 
빙하는 더더욱 빨리 녹을 것이다.
- 아룬다티 로이, 『아룬다티 로이, 우리가 모르는 인도 그리고 세계』 중에서

마치 지금의 우리 사회를 풍자하고 비유한 듯한 가상의 일같이 느껴지는 이 이야기는 
슬프게도 명백히 일어나고 있는 현실입니다. 
그것도 아주 명료한 사실이지요. 
지금 우리가 누리는 수많은 것들이 누군가의 자발적·타의적 희생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선량한 시민들”이라는 말을 다시 소리내어 되뇌어보면서 
그것 역시 오만한 생각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내가 민주적이고 보편적인 가치를 지향하며 살아간들, 
그것이 수많은 사람들의 안위와 행복을 빼앗는 것이라면 
과연 저는 선량한 사람일 수 있을까요? 
그런데도 내겐 전쟁을 막을 권한도 능력도 없으니 
그저 기도하는 것으로 책임을 다할 수 있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진짜 선량한 시민은 전쟁무기를 수출하는 것으로 연명하고 있는 국가의 재정을 
어떻게 다른 방식으로 메울 수 있을까 고민하기를 요청하는 시민일 것입니다. 
그에 대한 정확한 해답을 갖지는 못하더라도, 
그를 고민하라는 요구를 할 수 있는 시민이어야 합니다. 
이를 다시 우리 세월호 참사의 문제에 대입하자면,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만으로 
우리는 그 책임을 다 한 것이 아닙니다. 
광화문에서 장기 농성을 하는 것에 대한 시시비비를 따지려 드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서 
근본적으로 다시 성찰하라는 요청을 해내는 것. 
그것이 내가 겪지 않은 고통에 대해 겸손해지는 것, 
사회적 약자가 되어버린 이들에 대한 공감이 아닐까요? 

지난 8월 22일, 시간이 없어 세월호 유가족들을 만나지 못한다는 박근혜 대통령이 
부산 자갈치 시장을 방문하였습니다. 
추석을 맞아 물가를 점검하고 수산식품산업과 관련한 사업 추진현황을 확인한다는 명목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이 도전장처럼 느껴졌습니다. 
이것은 정치적 성향과 무관하게도 인간의 생명 그리고 진실을 요청하는 민주적 자유의 가치보다 
(허울뿐인) 경제논리와 권력의 유지가 더 중요하다고 선언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만천하에 대놓고 말이지요! 
틀린 논리에 기반한다면, 그것이 정치적 성향이나 가치관의 차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다수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하더라도, 
전 세계의 트렌드가 그렇다고 할지라도 틀린 것은 틀린 것입니다. 
생명보다 돈이 우선이라는 논리는 틀렸습니다. 
두 개의 가치는 같은 차원에서 비교할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문도 펼쳐보기 싫은 절망의 시대. 
여전히 목소리를 내게 되는 것은 이 절망을 멈추고 싶기 때문입니다. 
내가 지향하는 바가 선하고 정의롭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그 선량함이 누군가를 전쟁으로 내모는 현실을 전제한 것이라면 
기꺼이 다른 길을 택하고 싶다는 선한 의지 때문입니다. 

비정한 정부와 정치인, 기업가들이 권세를 장악한 시대이지만, 
그것이 다수의 뜻이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투표율 84.6%를 기록한 스코틀랜드 독립투표 정도가 되어야 
국민 다수의 뜻이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제게 희망은 아직 자신의 삶이 저 산 위의 빙하를 녹이고 있음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보통의 선량한 사람들에 있습니다. 
저 역시도 그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살아있는 한 희망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저 자신이 비열하게 살고 싶지 않다는 심연의 의지 때문입니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고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분명 다른 세계와 조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왜 희망해야 합니까? 어떻게 계속 희망할 수 있지요?”라는 질문에 
인도의 문학가이자 사회운동가인 아룬다티 로이는 시구로 답합니다. 
이 시구로 저 역시 답하고 싶습니다. 

“꿈이 좌절되면 갈망이 그 자리를 메우고
 재회가 불가능하면 그리움이 그 자리를 메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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