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고 서원에서 행복한 책읽기

박용준의 아포리즘(인디고잉 40호)-낡은 사랑

페이지 정보

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3-10-03 16:17 조회2,132회 댓글0건

본문

 

낡은 사랑

"우리가 고향의 목마른 황토길을 그리워하듯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내게 오래오래 간직해준
그대의 어떤 순결스러움 때문 아니라
다만 그대 삶의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그대의 몸짓 때문일 뿐
이제 초라히 부서져내리는 늦가을 뜨락에서
나무들의 헐벗은 자세와 낙엽 구르는 소리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세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내가 버리지 못하듯이
내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하찮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 뿐
그대의 절망과 그대의 피와
어느 날 갑자기 그대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져버리고
그대가 세상에서 빼앗긴 것이 또 그만큼 많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몸둘 바 몰라하지 말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생애 때문일 뿐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우리가 다만 업수임받고 갈가리 찢겨진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
조국의 사지를 사랑하듯이
내가 그대의 몸 한 부분, 사랑받을 수 없는 곳까지
사랑하는 것은"
-김정환, 「가을에」전문, 『지울 수 없는 노래』 중에서

나만 간직하고 싶어 숨겨두었던 시 하나.
나에게 가을은 이 한 편의 시로
시작하고, 또 끝난다.
무엇이 더 필요한가.
그대의 절망도 비참도 한숨도 분노도
내가 다 받아들일지니.

 

 

 

 

 

 

 

 

 

 

"그 여자 고달픈 사랑이 아파 나는 우네
불혹을 넘어
손마디는 굵어지고
근심에 지쳐 얼굴도 무너졌네
사랑은 늦가을 스산한 어스름으로
밤나무 밑에 숨어 기다리는 것"
-김사인, 「늦가을」, 「가만히 좋아하는』 중에서

사랑은 때론 가을 같아야 한다.
여름은 상실의 계절
작렬하는 태양에 모든 것이 녹아 형체도 없이 사라지는 "청춘의 격렬비열도"(박정대)
그래서 나는 가을이 와서야
그녀와 목하 산책을 한다.
사랑은 산책자
아스라이 스러지는 태양 노을은 하루 중의 가을
그리고 이 가을의 산책
그녀와 나는 이제 "도시의 산책자flâneur"(발터 벤야민)가 된다.

 

 

 

 

 

 

 

 

 

 

"너와 내가 뜨겁게 안는 순간 문득 우리가 죽는다면 몇천 년이 지나 우리는 화석이 될 것이다 그리고 후세 사람들은 박물관에서 신기하다는 듯이 우리를 만질 것이다 ... 비로소 천 년이 지나 사람들이 우리를 만질 때 돌 밖으로 눈물을 흘릴 것이다"
- 김경주, 「비정성시(非情聖市)」, 『나는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중에서

나는 그녀와 몇 번의 가을을 더 맞이하게 될까
"천 개의 고원"(들뢰즈)을 지나며 우리는 매일 아침
오늘은 어떤 고원을 넘을 것인지 함께 고민하겠지.
가을이 되어 나무들이 잎을 떨어뜨리는 건,
잘은 이파리들을 몰아내고
뿌리내리기에 몰두하기 위함인지도 모른다.
그래, 우리에게 가을은
화석과도 같은 삶의 지층 저 깊고 깊은 곳으로
견고한 뿌리를 내리뻗는 계절
그래야 몇 천 년을 함께 안을 수 있을테니까.

 

 

 

 

 

 

 

 

 

 

 

"러시아의 밤에 나는 낡은 나를 생각한다
내 속의 낡은 고독을 생각한다
...
나의 사랑은 러시아 혁명 호텔을 닮았다
나는 밤새도록 러시아 혁명 호텔에서 사랑을 한다
러시아 혁명 호텔 전체가 삐걱거리기도 한다
사랑은 간혹 낡아서 삐걱거리기도 하는 것이다
...
낡아서 사랑이다
아니 사랑이어서
오래도록 천천히 낡아갈 것이다
...
새롭고 낯선 사랑 때문에 가슴이 뛰는가,
나는 내 오래된 골동품 같은 그대가 좋다"
- 박정대, 「러시아 혁명 호텔」과 「리스본 27 체 담배 사용법」, 『삶이라는 직업』중에서

삐걱거리지 않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닳지 않는 사랑은 또 어디 있으랴.
고독과 기다림과 부끄러움과 눈물을 포개어
우리 사랑의 영토가 굳건해지길 기도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내 사랑의 뿌리도 오래도록 천천히 낡아가기를.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