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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준의 아포리즘(인디고잉 43호)-카디시와 이스코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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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6-25 11:05 조회2,02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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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디시와 이스코르
 - 진도, 애도, 묵도, 추도

박용준( 편집장)

 

* 카디시는 예수와 제자들이 사용한 아람어Aramaic로 ‘성스러운’이란 뜻이다. 이는 유대교 미사를 마무리하는 유족을 위한 ‘진혼의 기도’를 가리킨다. 이스코르는 히브리어로 ‘(신께서) 기억하시기를’이라는 뜻으로, 장례 후, 혹은 추도식에서 모든 회중이 조용히 함께 낭독하는 기도문을 의미한다.

“그대도 말하라,
마지막 사람으로,
그대의 판정을 말하라.
말하라―
그러나 ‘아니요’를 ‘예’와 가르지 마라.
그대의 판정에 뜻도 주라.
그것에 그림자를 주라.
그것에 그림자를 충분히 주라.
그것에 그만큼을,
네 주위 한밤중과 한낮과 한밤중에
두루 나누어 줄 수 있는 만큼 주라.
둘러보라.
보라, 사방이 살아나고 있다―
죽음 곁에서! 살아나고 있다!
그림자를 말하는 이, 진실을 말하는 것.”
- 파울 첼란, 「그대도 말하라」, 『죽음의 푸가』 중에서

어떤 슬픔은 결코 말해지지 않는다.
참담과 비통이 너무 깊어서
무력한 인간의 말이 이를 길어 올리지 못한다.
또 어떤 슬픔은 쉽게 말해서는 안 된다.
찢어지고 끊어진 삶 앞에서
우리의 애도는 하찮고 시시하다.
그럼에도 우리는 진도震悼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니까 울음이 비雨가 되어 천하를 진동하듯이振
아파하고 슬퍼하는悼 것.
진도珍島의 비참한 영혼을 위해, 그대 부디 진도해 달라.

 

 

 

 

 

 

 

 

 

 

“가만히 눈을 감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왼손으로 오른손을 감싸기만 해도
맞잡은 두 손을 가슴 앞에 모으기만 해도
말없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러주기만 해도
노을이 질 때 걸음을 멈추기만 해도
꽃 진 자리에서 지난 봄날을 떠올리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다.
음식을 오래 씹기만 해도
촛불 한 자루 밝혀놓기만 해도
솔숲 지나는 바람 소리에 귀기울이기만 해도
갓난아기와 눈을 맞추기만 해도
자동차를 타지 않고 걷기만 해도
섬과 섬 사이를 두 눈으로 이어주기만 해도
그믐달의 어두운 부분을 바라보기만 해도
우리는 기도하는 것이다.”
- 이문재, 「오래된 기도」, 『지금 여기가 맨 앞』 중에서

독일어 ‘생각하다Denken’의 어원을 따라가 보면
‘유념하다gedenken’, ‘기억하다eingedenk sein’,
‘추념Andenken’, ‘예배Andacht’의
의미 영역이 나온다.
그러니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태에서는
묵묵히 기도를 하자.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하자.
“기도할 때 두 손을 모으는 까닭은
두 손을 모으지 않고서는 나를 모을 수 없기 때문이다.
두 손을 모으지 않고서는 머리를 조아리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그대 부디 기도해달라.

 

 

 

 

 

 

 

 

 

 

“당신이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습니다.”
- 한강, 『소년이 온다』 중에서

추도는 죽은 영혼의 뒤를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 세상을 먼저 떠나보낸 이를 가진 자의 남겨진 삶은
매일이 장례식이다.
그것은 내가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것이다.
“어떤 분노는 이렇게 지속된다.
혼란과 무력감, 고통을 연료로 밑불처럼 낮게 탄다.
머리를 뜨겁게 하지 않고, 오히려 얼음처럼 차갑게 한다.”
잔악무도한 죽음을 목도한 우리의 분노는
서늘하고도 단단하게 매일의 장례를 통해 지속되어야 한다.
그러지 않고는
이 모든 것이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죽음으로 끝내 허물어지고 말 것이다.

“최악의 사람들, 이기주의자들, 폭력자들, 무감각한 자들, ‘회색지대’의 협력자들, 스파이들이 살아남았다. 최고의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 고통스런 순간들은 기억의 저장소에서 기꺼이 불러내지지 않고, 시간이 가면서 흐릿해지고 윤곽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 그럼에도 나는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어제 저지를 수 있었던 일은 내일 또다시 시도될 수 있고, 언젠가는 나와 우리 아이들이 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 프리모 레비,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중에서

 

 

 

 

 

 

 

 

 

 

어머니를 여의고 쓴 『애도일기』에서 롤랑 바르트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슬픔, 경화증에 걸린 슬픔은
“깊이가 없어진 슬픔”이라고 했다.
우리의 침전된 슬픔은 어떠한가.
우리의 기억은 이미 그 깊이를 잃어버리고
표류하고 있지 않은가.
조용히 눈을 감아본다.
어린 영혼들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말해야 한다.
영혼의 훼손과 관계의 파탄 속에서도
진실은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계속 싸울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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