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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준의 아포리즘(인디고잉 44호)-말하라 내가 너를 보고 있노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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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09-30 18:15 조회2,01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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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 나의 슬픔을 이야기하나……? 아들 놈은 죽었는데,
나는 이렇게 살아 있으니……. 이상한 일이랍니다, 죽음이 문을 잘못 열었으니……. 나한테 와야하는데 아들놈한테 간 거죠…….”
- 안똔 체호프, 「애수」, 『개를 데리고 다니는 부인』 중에서

참척慘慽(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는 일)을 당한 부모의 심정을
과연 헤아릴 수 있는가.
어느날 불의의 사고로 외아들을 잃은 박완서 선생은
참척을 당한 에미에게 하는 조의는
그게 아무리 조심스럽고 진심에서 우러나온 위로일지라도
모진 고문이요, 견디기 어려운 수모였다고
당신의 심정을 고백한 바 있다.
“내 아이가 더 이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서운 괴물처럼 가차없이 육박해오면 ...
그 다음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수시로 짐승처럼 치받치는 이 통곡과 설움을
어찌해야 하는가.



 

 

 

 

 

 

 

 

 


 

 

“고문에 시달렸던 사람은 이 세상을 더 이상 고향처럼 느낄 수 없다. 절멸의 수치심은 사라지지 않는다. 이웃을 적대자로 경험했다는 것은 고문당한 사람 속에 경악으로 굳어진 채 남아 있다. 그 누구도 그것을 넘어 희망의 원칙이 지배하는 세계를 바라볼 수 없다. 고문당한 사람은 속수무책으로 공포에 내맡겨진다. 그런 다음에는 사람들이 원한이라고 부르는 것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끝끝내 남아 있다.”
- 장 아메리, 『죄와 속죄의 저편』 중에서

극단의 분노와 헤아릴 길 없는 절망을 경험한 사람들이
다시 희망을 품게 되는 순간은 어떻게 올까.
과연 그들에게 희망은 가능한 꿈일까.
끝끝내 해소하지 못할 원한과 후회는
결국 어디로도 가지 못하고
마음 저 깊은 바다 밑에 쌓여
삶을 뿌리에서부터 뒤흔들겠지.
그래서 죽지 못해 살아가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침묵 속에서 우리를 죽음으로 내몰겠지.

 

 

 

 

 

 

 

 

 

 

 

 

 

 

 

 

 

 

 

“하나의 단어가 말해지는 곳은 환하게 밝아진다. 환해지리라,는 말이 거기에 현존한다. 그 말이 언어로 이해되기도 전에, 먼저 환함이 찾아온다. 희미하게 동이 트고, 뭔가가 지평선 위로 떠오른다. 빛줄기가 어둠을 뚫고 대기를 채운다. 말은 빛 속에 머물며 오직 빛과 함께 움직인다. 말 속에는 물론 어둠도 깃들어 있다. 말 속의 어둠은 빛으로 옮겨지기를 원하는 어둠이다. 침묵은 말에 속한다. 그렇다고 침묵이 빛에 대항하며 있는 것은 아니다. 침묵은 어둠이 아니다. 침묵은 산란된 빛이다. 말의 슬픔은 빛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라, 빛이 어둡기 때문이다. 하지만 비록 어둠이라도 빛으로 인해 환해질 수 있다는 것이 말의 위로이다.”
- 막스 피카르트, 『인간과 말』 중에서

분노도 절망도 원한도 후회도 모두
말의 어둠에 속한다.
그래도 어둠은 빛이 영영 사라진 것이 아니라
빛이 잠시 산란된 것이라는 말이 하나의 위로가 되지 않을까.
말의 어둠, 이 침묵 속에서 우리는
빛을 주어야 하고 빛이 되어야 한다.
어둠 속에서도 손을 잡으면
우리가 앞으로 걸어갈 수 있는 것은
그 침묵의 공모 속에 빛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말하라, 내가 너를 보고 있노라고.
말하라, 네가 말을 통해서 빛 속으로 오며,
그런 너를 내가 보고 있노라고.”

 

 

 

 

 

 

 

 

 

 

 

 

 

“악몽이란 생생한 법입니다

몇몇 악몽들이 암시했고 별빛이 비추고 있었습니다.
(…)
별이 못이라면 길이를 잴 수 없이 긴 못,
누구의 가슴에도 깊이를 알 수 없이 깊은 못입니다
오늘 밤하늘은 밤바다처럼 빛을 내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
빛을 비추며 아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서로서로 빛을 비추며 죽은 아이를 찾아야 했습니다
어디서 날이 밝아온다고 아무도 말하지 못했습니다”
- 김행숙, 「빛」, 『에코의 초상』 중에서

밤의 어둠 속에서 우리는 서로 닮는다.
밤하늘과 밤바다 사이의 경계가 사라지듯이
“저녁에 손을 모으면 / 누구의 손이라도 모두 닮았다.”
언제 날이 밝아
이 악몽에서 깨어날 수 있을지 아무도 알지 못하지만
이 눈먼자들의 나라에서
말이 빛이 되고, 너가 말이 됨으로써
서로를 껴안을 수밖에.
“우리를 밟으면 사랑에 빠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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