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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준의 아포리즘(인디고잉 45호)-복잡하게 말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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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4-12-26 12:04 조회2,025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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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잡하게
말해줘

““자, 여러분.” K가 힘이 잔뜩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여러분의 태도들로 보아 내 문제는 이제 해결된 것 같군요. 내 생각에는 당신들의 행동이 옳은지 그른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귀찮게 실랑이 하지 말고, 이제 악수나 하는 것으로 문제를 원만히 끝내는 게 최선인 듯합니다. 저와 같은 생각이라면, 자……”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감독관의 탁자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 손을 내밀었다.”
- 프란츠 카프카, 『소송』 중에서


이제 너는 그 모든 일들을 귀찮은 실랑이 정도로 치부하는 것만 같다.
악수나 하는 것으로
모든 것을 간단히 끝내려고 드는 것이다.

나는 아직 손을 잡을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너는 나에게 손을 들이민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아직 말하지도 듣지도 못했는데.
이 복잡한 심경을 어찌해야 하나…

“어떻게 너에게는 모든 일이 그렇게 간단하기만 해.”


 

 

 

 

 

 

 

 

 

 

 

 


“사실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더 복잡해.”
- 밀란 쿤데라, 『소설의 기술』 중에서

문제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간단히 해결될 것이었다면 이렇게 오래도록
내가 고통스러웠을 이유가 없다.

나의 이 고통은
이 복잡한 마음이 해소할 때까지 계속될 것이다.
지난 시간, 그 모든 순간을
하나하나 복기復棋하는 노력이 끝나기 전까지
나의 고통은 끝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단순하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말해보라는
말처럼 폭력적인 것도 없다.
그것이 오히려 나의 입을 닫게 만든다.



 

 

 

 

 

 

 

 

 

 

 

 

“그렇게 서서 그는 자신이 살인을 한 이유에 대해 결코 말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죽였는지 말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이유를 해명하려면 자신의 삶 전부를 설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 리처드 라이트, 『미국의 아들』 중에서

내가 왜 슬픈지 그 이유를 말하라고 한다면,
지나간 내 삶의 시간 모두를 설명해야만 할지도 모른다.
억울하고 분해서 눈물로 지샌 그 밤, 악몽에 잠 못 이루던 그 밤,
내려앉은 마음으로 근근이 보낸 어느 하루.

구경꾼의 눈에는 왜 모든 것이 그리 간단해 보이는 걸까.
그러니 “대단한 구경꾼들”이 가장 먼저 거둬들여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무심한 시선이다.

그리고나서 우리는 언제까지고
그들의 삶 전체를 듣고 또 들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는 마음의 교통이 불가능할 것이기에.



 

 

 

 

 

 

 

 

 

 

 

 

“네 마음을 내가 알아, 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네가 하는 말의 뜻도 나는 모른다, 라고 말해야만 한다. 내가 희망을 느끼는 건 인간의 이런 한계를 발견할 때다. 우린 노력하지 않는 한,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다. 이런 세상에 사랑이라는 게 존재한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한, 우리는 노력해야만 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을 위해 노력하는 이 행위 자체가 우리 인생을 살아볼 만한 값어치가 있는 것으로 만든다. 그러므로 쉽게 위로하지 않는 대신에 쉽게 절망하지 않는 것, 그게 핵심이다.”
- 김연수, 『세계의 끝 여자친구』 중에서

작가 조앤 디디온은 말한다.
“우리는 슬픔에 젖으려 하지 않는다”고.

슬픔에 젖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들은
그 고통의 깊이를 하찮고 사소한 것으로 환원하여
간단하게 정리하려 한다.
복잡한 마음의 세계에 연루되고 싶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상처 입은 이의 삶을 들여다보려는 섬세한 관심,
그러나 함부로 침범하지 않는 성숙한 배려,
헤아리는 슬픔과 경건한 애도,
이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의 실천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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