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주들

[제76회] 오종우 선생님과 함께한 주제와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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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5-04-22 12:10 조회39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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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볕 아래
함께 하는
예술 수업

김은비(18세), 김상원(23세)

예술은 인간 삶을 풍부하고 아름답게 만들어 준다. 하지만 이해하기 힘든 퍼포먼스나 지겨운 클래식은 우리를 예술과 멀어지게 만든다. 게다가 나도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림이 천재의 훌륭한 작품이라는 이야기도 받아들이기 어렵다. 이런 우리를 위해, 제76회 주제와 변주에는 『예술 수업』의 저자 오종우 선생님이 자리해주셨다. 3월 1일, 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햇볕이 달라지는 봄의 시작, 선생님의 책에서 흘러나오는 예술의 향기에 이끌린 많은 분들이 함께해주셨다. 러시아어를 전공하셨음에도, 예술의 매력에 빠져 예술 수업을 시작하셨다는 오종우 선생님은 2시간 동안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예술은 사소한 것들의 무늬를 그려 전체의 삶에 스며들게 하는 능력이 있다는 오정우 선생님의 말씀처럼, 예술로 삶을 그릴 수 있는 자리였다.

 

 

 

 

 

 

 

 

 

 

인디고 저는 평소에 예술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데요, 얼마 전에 시립미술관에 가서 그림을 본 적이 있는데 그림이 이해가 안됐어요. 제가 보기엔 엉망진창이었고 ‘저건 나도 그릴 수 있는데 왜 걸려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런데 책을 읽으며 의문이 풀렸던 거예요. 모네의 <워털루 다리>라는 그림에 대한 소개에서 화가의 시선에 대해 이야기하셨잖아요. 흔한 사과, 오렌지, 책상일 뿐인데 작품이 되는 게 의문이었는데 그 이유가 화가의 시선 자체를 보여주기 때문이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 드리고 싶은 것은 세상은 우리에게 해석하는 만큼 보인다고 하셨는데, 아는 만큼 작품이 보인다면, 선생님께서는 예술작품을 어떤 식으로 보고 화가의 시선을 찾아내는지 궁금했어요. 예술을 안다면 세상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는 길
이 되지 않을까요?

오종우 현대작품에서 작가의 시선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길 정도가 되려면 일종의 삶의 고통이 있어야 해요. 미안한 얘기지만 열정이라는 단어는 ‘열심히’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고통이라는 뜻, 신의 고통이라는 뜻이에요. 힘들고 어려운 상황 속에서 같은 현상도 달리 보이는 눈이 생겨야지 달리 보이는 거예요. 뭐라는 정답 절대 없습니다. 다른 강연에서 “저는 사진은 잘 찍는데 잘 찍은 사진이 예술과 어떻게 달라요?”라는 질문을 받았어요. 단숨에 얘기할 수는 없겠죠. 대개 유치하고 감상적이거든요. 그걸 아직 파악하지 못하는 것은 아직 그 고통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살면서 혹시 힘드세요? 아주 귀한 경험입니다. 편하세요? 나중의 삶이 성숙하지 못해요. 진짜를 구별할 수 있는 안목은 고통에서 길러집니다.
또 예술작품을 통해 의미를 발견하려 하지 마세요. 의미는 생성됩니다. 좋다, 나쁘다, 그거면 된 겁니다. 관심이 가네? 그렇게 성장하고 시야가 넓어지는 거거든요. 예술은 다른 텍스트와 달리 그 자체를 통해 의미를 생성하게 하는 것이 진짜입니다. 욕심을 내면 힘들어지고요. 좋아하니까 가능해지더라고요. 그리고 힘든 거 절대 피하지 마세요. 힘든 걸 겪어나가세요. 그게 열정이 됩니다. 그건 여러분이 이제 해나가야 하는 일이죠.

인디고 어떻게 예술에 관심을 갖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선생님께서 러시아 문학 전공이시라 전공이랑 크게 연결되지 않아 보이기도 하는데, 예술을 새롭게 볼 수 있는 시각은 언제부터 갖게 되셨나요?

오종우 저는 84학번이에요. 정의와 인권이 말살된 시기여서 특별하게 의식이 없어도 불만이 많았죠. 피가 뜨거울 때니까. 그런데 러시아를 공부하다 보니까 그때는 아무리 봐도 세계 음악사를 쓰려고 하면 러시아를 빼고 쓸 수가 없더라고요. 미술사도 러시아 작가들을 빼면 세계 미술사를 쓸 수가 없어요. 영화도 러시아 감독들이 없었다면 활동사진에 불과했을지 몰라요. 소설에서도 러시아에서 현대극이 생겼어요. 발레? 무슨 작품 떠올라요? 다 러시아 것이에요.
이상했어요. 기성세대가 당시 소련이었던 러시아를 미개하다 말하는 것과는 달랐어요. 그리고 대학에 김준엽 총장님이라고 독립운동가 출신의 어른이 계셨는데 정말 학생들과 대화도 많이 하시고 보호해 주려 애쓰셨던 분이었어요. 험악한 정권에서도 이런 총장님을 승인했다는 것이 제게 엄청난 위안이었죠.
암흑이라고 듣던 소련에서 이런 예술적 성과가 있다는 것과 이 시대에도 김준엽 총장님 같은 인물이 있다는 것, 그것은 시대의 희망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는 이걸 해야겠다, 비즈니스도 하고 다 필요하지만 나는 어렵고 힘들더라도 평생동안 이 공부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이 책은 그때부터 공부한 삼십 년의 노력을 아주 쉽게 풀어내려고 노력한 거예요.

 

 

 

 

 

 

 

 

 

 

인디고 사실 저는 미술을 찾아다니며 보지 않아요. 평소 미술관을 왜 가는 거지, 생각을 하는데 책에서 <그랑드 자트 섬의 일요일 오후>를 보면서, 그림 안의 의미보다도 ‘이 그림 그린 사람이 점 찍으려면 얼마나 노력했을까?’ 그 정도로 생각했단 말이죠. 그럼 저는 예술이라는 부분을 단순히 그림 그리기로 본 거지, 예술로 본 거라고 말할 수 없지 않을까요?

오종우 ‘점 찍는 데 고생했겠다’는 생각은 조금 지나면 ‘왜이런 쓸데 없는 짓을 했을까?’, ‘왜 이걸 명작이라고 했을까?’로 발전하죠. 그때쯤 되면 그림의 의미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고 남들의 의견을 찾아볼 수도 있고 본인의 해석이 나올 수도 있죠. 그건 단계에요. 어떻게 한꺼번에 정리가 될 수 있겠어요? 그런 질문은 이미 큰 관심을 가진 거예요. 그건 아무나 하는 생각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건데요, 이 세상에 어떤 성인군자도 빼어난 학자도 어느 순간 갑자기 훌륭해진 경우는 없어요. ‘누구나 왜 이렇게 고생스럽게 점을 많이 찍었지?’에서 시작한 겁니다.

인디고 책에서 원초 언어를 잘 사용해서 만들어진 예술을 좋다고 하셨잖아요. 제가 가진 의문은 예술은 매개체가 다양하고 장르도 다양한 데 모든 작품이 원초 언어를 사용할 수 있는 것인지, 또 어떤 작품이 보는 사람들이 교육 없이도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되는 것인지 궁금합니다.

오종우 모든 예술은 원초 언어를 씁니다. 문학작품마저도요. 제가 최근 과학자들에게 강좌를 하면서 늘 얘기하는 것이 과학도 예술하고 같다는 거예요. 과학 공식이 있으면 그걸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말고 원초 언어로 만나야지 그게 진짜 공식이 된다는 거죠. 예를 들어 2 곱하기 2는 4를 그냥 받아들이면 발전이 없다, 그것이 처음 만들어졌을 때의 감각을 가지고 시작을 해야 한다는 거예요. 인문학도 마찬가지로 모든 것의 기본에서 사람들의 고뇌와 고통을 이해해야 해요. 그리고 인간이란 어떤 가치를 가졌는지 해석해야 합니다. 그래서 삶의 전망을 찾아내는 것, 이것이 인문학입니다.
즉 예술적 감각, 상상력이라는 것은 예술가가 하는 것이라면, 모든 인간이 예술가입니다. 기성에 있던 모든 것이 탄생했을 때의 마음으로 만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모든 예술작품은 원초 언어라고 표현한, 그걸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에요. 가끔 미술사에서는 이차적인 언어로 그 작품과 경향을 정리하려고 하는데 그게 정답은 아니거든요. 감각으로 작품을 만나야지 진짜 그 작품이 살아있게 되죠.

인디고 베토벤의 <합창 교향곡>을 거리에서 연주했을 때 사람들이 함께 동참해서 지휘도 하고 감동을 나누는 영상을 함께 보았는데요.그 장면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지금 한국 사회의 교육이나 삶에서 거리, 또는 삶의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함께 박수 치고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남아있을까요?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 또는 문화를 우리가 잃어버린 게 아닐까요? 이 중요한 것들, 인문적‧문화적‧예술적 향연을 삶 깊숙한 곳의 노래로 번져오는 데까지 본질적으로 어떤 노력이 좀 더 필요할까요? 정말 아름다운 것이 일상에서 흘러나올 수 있게 예술을 향유할 수 있는 감성을 깨울 중요한 전환은 어떻게 가능할까 궁금합니다.

오종우 그건 조금씩 퍼져나가는 거지, 새마을운동처럼 한번에는 안 되죠. 사람이라는 존재는 대게 그윽한 존재에요. 정말 나쁜 짓 하는 극악한 흉악범죄자부터 매일 비난만 하는 정치인에 이르기까지, 그럼에도 사람이기 때문에 범죄자들도 자기 잘못한 것에 잘했다고 생각하는 사람 하나도 없고, 남을 험담했을 때 순간은 이겼다 할지 몰라도 세월이 흘러갈수록 마음에 짐이 되는 것, 이것이 인간이라는 존재예요. 다만 급박한 실리의 시대이기 때문에 본질적 가치를 자꾸만 미루게 하니까 잊힌 것처럼 보이죠.
건강하기 위해서 몇 년에 한 번씩 보약을 먹는 것과 그냥 매일 몸에 좋은 차 꾸준히 마시는 사람 중에 누가 더 건강할까요? 무슨 얘기냐 하면 우리는 너무 거창한 계획들에 현혹돼 있어요.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자고 소리친들 구현되나요? 그것보다도 차 한 잔 마시는 것 같은 작은 실천이 세상을 바꿔요. 계획을 왜 세웠죠? 삶을 바꾸려고 세웠잖아요. 그걸로 인해서 건강만 바뀔까요? 아니에요. 사소한 게 습관이 되면서 변화를 일으킵니다.
이 시대에 얼마나 많은 정보가 있습니까? 그렇지만 중요한 소식은 안 와요. 없기 때문이에요. 멋진 말? 실천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우리가 만들어내야 해요. 예술이 그거라는 거예요. 이건 생산해내야 해요. 예술은 정치혁명처럼 거창한 구호 외치지 않아요. 불가능해요. 실천되지 않아요. 사소한 것들의 무늬를 그려서 전체에 스며들게 해요. 여러분 생활의 계획과 실천에 대해 얘기했지만 이것은 진리입니다. 사소한 시선의 변화가 스며들어 가는 거예요. 희망의 노래는 행복할 때 듣기 좋은가요? 행복과 즐거움으로 가득할 때가 아니라 어렵고 힘들 때죠. 예술은 그런 겁니다. 마지막으로 아직도 저를 지배하고 있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 나오는 문장을 선물로 드립니다.
“마음의 인상을 계산하여 받아들이고 열렬하기는커녕 그저 뜨뜻미지근한 정도로 사랑하며 정확하긴 하되 나이에 비해 너무도 논리적인 그렇기 때문에 값싼 그런 청년이라면 단언컨대 틀림없이 나의 청년에게 일어난 일을 피할 수 있을 테지만 어떤 경우에는 비록 비이성적으로 보일지라도 크나큰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열광에 몰두하는 것이 아예 그러지 않는 편보다 훨씬 더 높이 살만하다. 청년 시절에는 특히 더 그러한데 왜냐하면 일관되게 논리적이어서 핑계나 대는 그런 청년은 희망이 별로 없으며 그건 싸구려 인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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