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주들

[제86회] 윤구병 선생님과 함께한 주제와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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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7-06-17 23:05 조회164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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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공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양서영(16세)


고등학교 입시를 앞둔 저와 제 친구들에게는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단연 가장 큰 이야깃거리입니다. 올해 어떤 고등학교 커트라인이 전교 3등까지였다더라, 서울 가려면 적어도 상위 30% 안에는 들어야 한다더라, 하는 말을 하루에도 수십 번씩 말하고 듣습니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입시에 대한 푸념을, 걱정을 털어놓습니다. 그러던 중 누군가 말합니다. 어차피 고등학교 공부는 수능을 치면 다 까먹는다더라.
그 말에 “야, 그럼 우리 공부는 왜 하냐?”라고 말하며 모두가 자조적으로 웃고 맙니다.

얼핏 스쳐 지나가는 넋두리 정도로 여길 때가 많지만 아마 안 해본 사람은 없을 질문입니다. 시험을 끝내고 침전물처럼 남는허탈함에, 아니면 몇 시간 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다 결국 피로에 못 이겨 책상을 떠나면서 공부 왜 하나, 하고 뇌까립니다. 동시에 우리가 답해야 할 중요한 물음 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왜 삶에 꼭 필요한 기술은 가르쳐주지 않는 교육을 받아야 하나요? 이러한 질문에 우리말의 중요성과 함께 답하신 분이 계십니다.

10월 중에서도 유난히 춥던 둘째 주 일요일,『내 생애 첫 우리말』 저자 윤구병 선생님께서 인디고 서원을 찾으셨습니다. 마침 그날은 한글날이 세상에 나온 지 60해 되는 날이었습니다. 그날 윤구병 선생님께서 전해주신 이야기를 기사에 담았습니다.

왜 우리말이 중요한가

어릴 적 쓰던 말을 떠올려보면 우리말이 대부분입니다. 어린 나이에 ‘이야기’ 대신 ‘담화’라 하면 주위 사람이 신기한 듯 마냥 쳐다보죠. 하지만 점점 나이를 먹을수록 상황은 뒤바뀝니다. 유식해 보이는 한자어나 외래어를 쓰지 않으면 무식한 사람 취급받기 부지기수고, 무시 받지 않기 위해 필요 없는 영어에다 일본어, 한자어까지 총동원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유식해 보이기 위해 쓰는 한자어는 공허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봅시다. 눈을 감고 먼바다를 떠올리면 한눈에 배경이 그려집니다. 어디선가 갈매기 우는 소리가 들리고, 코끝을 아리는 바다내음이 사뭇 전해집니다. 이런 말을 놔두고 ‘원양’이라 바꿔놓으면 어딘가 동떨어진 기분입니다. 딱딱하고, 이질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말을 모든 곳에서 접합니다. 일상 대화에서, 책에서, 습관적으로 켠 텔레비전에서, 길거리에서. 살아 숨 쉬는 말을 두고 속이 텅 빈 한자어로 이야기를 채워나가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소통에 장애가 될 뿐이죠.

제가 겪었던 한 이야기입니다. 15년 동안 맡았던 교수직 을 내려놓고 시골로 내려가 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농사를 짓자니 시골엔 처음 내려온 터라 언제 콩을 심어야 할지 알 수 없었습니다. 누구에게 여쭈어야 할지 생각하는 제게 풍산 아주머니께 여쭈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풍산 아주머니는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았지만, 농사지어 밭도 사고 집도 사서 부모 잃은 아이들도 거둬 살아가는 분이셨습니다. 저는 풍산 아주머니께 찾아가 최대한 예의를 차린 채 말했습니다. “대두 파종 시기에 관한 문의 차 방문했습니다.” 풍산 아주머니는 알아듣지 못하셨습니다. “대두? 대두는 무엇이며 파종 시기는 또 무엇이냐?” 그러자 저는 우리말로 다시 말했습니다. “콩 심는 때를 여쭈어보러 들렸
습니다.” 그때서야 풍산 아주머니께서 답하셨습니다. “감꽃 필 때 검정콩 심고 감꽃 질 때 메주콩 심지.”

어떤 답보다 과학적이고 자연과 가까운 답이지 않나요? 언제 태풍이 오고 비가 쏟아질지 모르는데, 어정쩡한 예측보다 감꽃 필 때야말로 콩 심는데 가장 적절한 시기일지 모릅니다.


말의 기원
우리가 쓰는 말 대부분은 아이들이 만들었다고 우리는 어떤 것을 참이라 하고 어떤 것을 거짓이라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말을 배우기도 모자란 아이가 오히려 할까요? 굳이 유명한 철학자의 이름을 읊으며 깊게 파고들 말을 만든다니, 믿기 어려운 것도 무리가 아닙니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죠.

어린아이가 옹알이할 때쯤 내뱉는 말 중 가장 쉬운 말이 참입니다. 아이가 ‘마’ 라고 하면 , 옆에 있던 엄마가 기뻐 어쩔 줄 모르며 우리 아이가 드디어 나를 알아봤다고 합니다. 아이 입장에서는 그저 자연스레 흘러나오는 소리를 말했을 뿐인데, ‘ 마 ’ 라 할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의 눈꼬리가 초승달처럼 굽어 휘며 좋아하기에 몇 번이고 말합니다 . 이렇게 ‘마’ 가 삶에서 가장 가깝고 소중한 사람을 칭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어제’ 가 어떻게 생긴 말인지 아시나요? 아마 어릴 적 누군가가 어제를 지나간 날로 지칭하기에 자연스레 알게 된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놀랍게도 어제와 이제, 아제(내일) 사이에는 규칙이 숨어있습니다.

규칙이라 함은 바로 아래 아 (·) 와 모음 ‘ ㅣ’ 의 위치입니다. 아래 아가 모음 앞에 있으면 지난날을 뜻하는 어제, 이제는 오늘이고 아래 아가 모음 뒤에 있는 아제는 아직 안 온 날을 뜻합니다.  신기하지 않나요 ? 우리말은 그저 별 뜻 없이 만들어진 말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책에서 말했듯, 누가 어제를 과거로 내일을 미래로 바꾸어놓았나요? 언제부터 우리는 우리말보다 한자어나 외래어를 더 익숙하게 느꼈나요?

우리말은 다른 나라말이 아니라, 우리말로 설명할 때 온전히 그 뜻이 전달됩니다 . 참과 거짓 , 그리고 있다와 없다 역시 그러합니다.

있는 것과 없는 것​

우리는 어떤 것을 참이라 하고 어떤 것을 거짓이라 할까요? 굳이 유명한 철학자의 이름을 읊으며 깊게 파고들어 갈 필요는 없습니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없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 무언인 것을 무엇이라고 하는 것이 바로 참입니다. 예를 들어 컵을 컵이라 하고 잔을 잔이라 할 때 우리는 참으로 여깁니다.반대로 참인것을 아니라고 하고 아닌 것을 참이라고 할 때 거짓이 됩니다. 좋고 나쁨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음은 있을 것이 있고 없을 것이 없는 것이며 나쁨은 없을 것이 있거나 있을 것이 없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죠. 
교육의 목표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생존을 위해, 즉 앞가림을 위한 것이며 두 번째는 서로 도우면서 살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학교 책상에 앉아있으면  선생님이 앞가림하기 위한 방법을, 또는 협동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배워야 할 것을 못 배우고,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교육은 참이 될 수 없습니다.
변산 공동체는 제가 직접 만든 공동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직접 농사지어 기른 농산물로 자급자족하고, 공부에 얽매이기보다는 살아가는데 정말 필요한 공부를 할 수  있는 곳이죠. 변산 공동체 학교에서는 딱 세 시간만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국영수같은 과목도 없습니다. 쌀의 역사, 옷의  역사 등 사는 데 필요한 공부를 합니다. 대부분 청소년에게는 이상적인 교육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런 교육은 누군가에게 필요 없다는 생각을 안겨줄 수도 있습니다. 대입에는 하등 도움이 안 되기 때문이지요.
스무 명이 넘는 조선 왕 중에 백성의 삶을 눈여겨본 왕은 몇 명이나 되나요? 다섯 손가락 안에도 꼽히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우리는 그들의 삶과 정책을 외워야 하나요? 단순합니다. 시험을 잘 치기 위해서죠. 이런 시험을 보게 하는 대학교수가 우리를 살리는 데 관심이 있나요? 약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나요? 최근 시국만 보아도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공무원 중에서도 고위 공직자나 대기업 사원 중에는 서울 상위권 대학 3개교가 차지합니다. 이런 범죄 행위를 우리 대부분은 돕습니다. 99명은 가난한데도 대기업에 취직한, 또는 돈이 많은 1명의 시중 노릇을 하고 있는 거지요.

정답이 하나인 것은 세상에 아무것도 없습니다. 산에 올라갈 때도 그날 기분에 따라 갈 수 있는 길은 여러 가지입니다. 그러나 현재 우리 교육은 시험에서 가장 많이 맞추는 사람이 가장 좋은 대학에 들어가고, 가장 좋은 대학에 들어간 사람이 좋은 기업에 취직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습니다. 만약 이러한 현상을 옳다고 여기지 않았다면 세월호 참사 당시에 그렇게 많은 생명이 사라질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학교를 무조건 벗어나는 일이 최선이라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현재 교육제도는 최악입니다. 교육이 바뀌지 않는다면 사회 또한 바뀌지 않을 것입니다. 대신에 우리는 덜 나쁜 쪽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저 강물 흘러가는 대로 맡기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사고하고 조금 더 참인 것을 선택하며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할지 사유해야 합니다.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여러분이 곧 맞이할 내일의 모습이 어떻길 바라나 요? 윤구병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우리가 현재 받거나 받았던 교육은 참보다는 거짓에 가깝습니다. 언젠가 서울에 갔을 때 누군가 담벼락에 ‘인간의 꿈은 상어와 같아 멈추면 질식해 죽는다'라는 말을 스프레이로 휘갈겨 써놓은 것을 봤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상어와도 같은 꿈을 꾸어야 하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거짓이라 불리는 우리 교육이 어떻게 바뀌었으면 하고, 무엇을 배우길 바라나요? 이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토론하는 활동이 절실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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