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주들

[제90회] 하지현 선생님과 함께한 주제와 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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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18-03-09 10:29 조회20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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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독립을 위한

진단과 처방

 

 

정리 송현진(17세)

 

 

지난 9월, 부산에서 한 여중생에게 같은 학교 학생들이 심각한 폭력을 가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사건은 곧 온 나라를 휩쓸었고 그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다른 여러 사건이 물 위로 드러났습니다. 어떻게 이리도 끔찍한 폭력을 저지를 수 있나, 어떻게 인간이 저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속속히 등장한 다른 사건들을 보면서 무섭다는 생각보다도 이상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사실 ‘어떻게 인간이 그럴 수 있나’라는 생각이 드는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오히려 수많은 사건 중 하나에 불과하죠.

처음에는 그저 한 개인의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한 개인의 공감 능력의 결여, 한 개인의 폭력적인 성향, 한 개인의 불편함이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선천적인 예외 혹은 개인의 특이사항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많은 사람이 문제를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개인이 아닌 사회였습니다. 우리 사회는 개인에게 너무도 많은 책임을 지우고 있고 간접적으로 각 개인을 벼랑으로 몰아붙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의 아픈 심리 증상을 개인의 책임이나 성격 탓이 아닌, 한국 사회의 구조적 관점에서 진단하고 처방하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정신과 전문의 하지현 선생님입니다. 이번 주제와 변주는 『지금 독립하는 중입니다』, 『대한민국 마음 보고서』의 저자 하지현 선생님을 초청해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개인들의 문제 해결에 관해 얘기 나눴습니다. 여기에 그 기록을 남깁니다.

 

 

전체와 부분의 대립

 

 

하지현 안녕하세요. 하지현입니다. 오늘 사회자가 질문한 여중생 폭행 사건으로 이야기를 시작해볼까 합니다.

통계를 보면 정규 분포 그래프라는 게 있는데, 그걸 그려보면 중간이 제일 많고 양 끝은 그 수가 적은 낙타 혹 모양이에요. 근데 이 그래프의 일정 영역을 딱 자르면 그 안에서도 편차가 있잖아요. 그래서 자기는 전체에서 보면 중간 부분인데 어떤 부분만 잘라서 보면 그중에 자기가 오른쪽(상위권)에 있죠. 그러면 아주 잘하는 것처럼 느낄 수도 있어요. 반면, 자기가 전체에서는 잘하는 학생인데 잘하는 그룹을 부분으로 자르면 그 안에선 왼쪽(하위권)에 있다. 그러면 못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요. 예전에 어떤 학생이 찾아온 적이 있었어요. 인문계에서 열심히 공부해서 카이스트에 간 학생인데 자기는 너무 공부를 못한대요. 고등학교 때까지는 자기가 학교에서 가장 공부를 잘 하는 애고, 가장 똑똑한 애였는데 대학에 가보니까 어라, 자기보다 훨씬 잘하는 애들이 많은 거죠. 자기는 이때까지 계속 공부 잘하는 애였는데 이젠 아닌 것 같고, 수업도 못 알아듣겠고 너무 어렵잖아요. 그러니까 자기는 공부를 못 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전체 그래프에서 보면 학생은 그래프에서 상위 부분이고 전혀 공부를 못 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중간 부분에 있는 평균 사람들이 보면 되게 똑똑해요. 그런데 학생이 속한 집단만 잘라보면 자기는 그 안에서 중간보다도 밑에 있는 거죠. 그래서 아까 말한 것처럼 불안하고 고통스러운 겁니다. 여중생 폭행 사건을 보면 폭력적이고, 무섭고 ‘어떻게 저렇게까지 하지?’ 싶은데 정작 그 아이들은 그렇지 않을 수 있어요. 자기들 그룹에서는 그런 행동이 별거 아니고, 주변 애들도 다 하는 거니까, 별다를 게 없는 거예요.

 

 

집단 속의 나

 

 

그렇다면 내가 속한 집단이 추구하는 것과 내가 다른데 자신을 집단에 맞추는 게 맞는지 어느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게 옳은가라는 고민이 될 때가 있어요. 그러니까 나하고 가치관이 너무 다른 집단에 있는데 그런데도 나는 거기에 맞춰야 할지 “나는 이게 싫어!” 하고 과감히 이야기해야 할지 말이죠. 여기에 대해서 많은 연구가 있어요. 인류학적 연구가 그래요. 실제로 나라별로 가치의 표준, 기준점이 다 다르고 그 시대별로도 달라지는 것 같아요. 가깝지만 먼 나라라고 얘기하는 일본과 우리나라의 제일 큰 차이는 거기에 있다고 그러더라고요. 일본은 이 사회 조직에 어떻게든 개인은 순응하도록, 집단과 다른 행동을 하는 순간 완전히 배척당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런 부분들에 대한 엄격함이 존재한다 그래요. 그리고 주고받는 게 굉장히 명확하다고 하지요. 예를 들면 다른 일본 분들 보면 뭘 받으면 꼭 무언가를 돌려줘야 하는 게 꼭 있거든요. 서로 간의 규정을 지키는 것들이 필요한 거죠. 한편으로는 우리가 조직이나 공동체에 순응적인 사람들일 거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에 비교하면 개인적인 면이 많고요. 또 우리가 정말 개인주의적이라고 생각하는 미국사람들보다 더 심한 사람들이 또 있죠. 유럽 사람들. 유럽 사람 중에서도 프랑스 사람들이 그럴 거고 거꾸로 독일 사람들은 조직에 맞추죠. 누군가 차 주차할 때 금 밟아서 해두면 바로 딱지 떼라고 전화하는 사람들이 독일 사람들이거든요.

 

 

나만의 스타일을 만들어라

 

 

이처럼 인간이라면 누구나 같이 살면서 만들어진 문화적 기준들을 가집니다. 그렇다면 나를 어떻게 지킬까에 대해 생각해봐야 할 것 같아요. 다른 사람이 내 취향을 충분히 알아야 해요. 그게 없으면, 이 조직에 가면 막 여기에 휩쓸리고요, 저 조직에 가면 저기에 휩쓸려요. 내 주관이 없는 사람은 여기선 또 여기서, 저기선 또 저기서. 적응을 잘하는 사람이라고도 할 수는 있겠지만 그런 사람들에게 “너는 뭐가 좋아?” 물으면 “좋은 게 없는데”라고 얘기할 수도 있겠죠. 그래도 ‘나는 어떤 게 좋아’라는 건 있어야 해요. 내 주관은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러면 다양한 종류의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알면서도 조직에서는 여기가 주로 어떻게 돌아가는지 눈치껏 파악하려고 노력해야 해요. 눈치가 빠르면 절에 가서도 새우젓을 얻어먹는다는 얘기도 있잖아요. 저도 여기 처음 왔는데 아주 어린 친구들이랑 어머니들이랑 성인들이랑 같이 있어서 어떻게 얘기할지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런 거 보면서 저는 초기에 분위기를 보는 거예요. 내 식으로만 진행하는 게 아니고. 그러면서 적응해 나가는 거죠. 그러면서도 저는 제 방식이 있습니다. 어떤 선생님은 파워포인트 파일 보여주시는 선생님도 있으실 거고, 어떤 선생님은 다 써와서 읽는 선생님도 있을 거고 그냥 자유롭게 얘기하는 선생님도 계실 거고. 다양하겠죠. 내 스타일을 만들어 가는 게 좋아요. 그러면 그게 균형이 잡히는, 나를 잃어버리지 않게 하는 길이 될 것 같아요.

 

 

무엇인가 미치도록 좋아한다는 것

 

 

아이들이 연예인 좋아하고 만화 좋아하고 그러면 부모님들이 대개 하지 말라고 하잖아요. 딴짓하지 말고 공부나 하라고 그러고. 그런데 저는 팬 활동을 하라고 그래요. 그런 몰입의 경험이 있어야 오히려 에너지를 적절하게 쓸 수 있고 나중에 다른 일을 할 때도 열심히 할 수 있거든요. 예전에 제 아들이 새벽에 깨워달라고 그러더라고요. 그래서 “왜?” 하고 물어보니까 어딜 가야 한대요. 평소에는 아침 내도록 잠만 자던 앤데, 좋아하는 만화 행사가 있는데 빨리 가서 줄을 서야 하니까 새벽에 깨워 달래요. 그래서 새벽에 같이 일어나서 데려다줬어요. 이러면 부모님들은 대부분 “딴짓하지 마라, 공부나 해라, 공부를 그렇게 하면 전교 일등은 벌써 했겠다” 그러시는데 ‘덕질’하는 게 오히려 더 정상적인 거예요. 공부면 정말 좋겠지만 그게 아니더라도 연예인이든 만화든 영화든 한 번쯤 무언가에 열심히 몰입한 경험이 있어야, 좀 미쳐본 적이 있어야 나중에 다른 일을 해도 잘 할 수 있거든요. 청소년기에 이렇게 밤을 새울 정도로 열심히 무언가를 한 경험이 있으면 나중에 공부할 때나 일을 할 때도 목표에 도달하기 쉬워요. 이렇게 열심히 몰입해서 하다 보면 ‘내가 이것도 할 수 있다’라는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거든요.

저는 상담하러 오는 애들한테 좋아하는 게 있냐고 물어봐요. 있다고 대답하는 애들도 있고 아니라고 하는 애들도 있는 데 있다고 대답하면 이미 반은 성공한 거예요. 그러면 몰입의 방향만 조금 바꾸면 되는 거거든요. 아니라고 하면 그게 더 문제예요. 이것도 해봤는데 재미없고, 저것도 해봤는데 재미없고 그러면 사람이 텅 비어 버리거든요. 되게 공허하고, 헛헛하고 그래요. 근데 쓸데없는 것 같아도 좋아하는 게 생기면 안 그래요. 그게 내가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도와줘서, 주변에서 뭐라고 하든 흔들리지 않고 앞으로 잘 나아갈 수 있어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화제를 조금 바꾸어 역사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증기기관이 만들어지면서 평민 중에서도 부자가 나오고 귀족들이랑 대척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그 사람들에게 윤리의식이라는 게 필요하게 되었죠. 이전의 질서와는 다른, “무엇이 옳은가”라는 질문입니다. 성경에 보면 부자는 천당 가기 어렵다 이런 이야기가 나오니까 왠지 자기들하곤 안 맞는 것 같아서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의식이란 걸 만들게 돼요. 청교도적인, 근면·성실. 그러니까 열심히 일하면, 열심히 일하고 탐욕스럽지 않으면 천당에 갈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은 존경받을 수 있어요. 그런 얘기가 1800년도부터 갑자기 세상에 뚝 떨어진 거예요. 그게 자본주의적 사고방식으로 넘어가서 극단적으로 가는 게 신자유주의고요. 70년대부터는 내가 중요해졌어요. 당신이 열심히 살아서 성공하면 좋은 거고 실패하면 네 문제라는 거죠. 그래서 나를 강화해야 해요. 거기서 자기계발이 나왔어요. 내가 근면하고 나를 개발시키고, 이런 부류의 이야기들을 써서 성공한 사람들도 있지만 실패하면 내 책임인 거죠. 근데 사회가 거대하게 확산해 갈 때는 그게 먹혀요. 세상이 이렇게 발달해가는 시점에는 여기에 있으면 같이 타고 있는 것만으로도 조금만 노력하면 거기 흐름이 좋으니까 나도 대강 거기 앉아있음 성공할 수 있었습니다.

근데 문제는 세상이 노력한다고 그렇게 달라지지 않는 거예요. 그러면서 어떤 문제가 생기게 되냐면 나는, 컵은 딱 멈춰서 물을 잘 담고 있는데, 테이블이 막 흔들리는 거예요.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것도 지금 말한 이 개념으로 보면 또 내 탓인 것 같은 거예요. 너무 괴로운 일이죠. 나는 변화해야 하고 내가 더 성장해야 하고, 개혁해야 하고 달라져야 하고. 꼭 그래야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근데 그런 강박감이 생겨 있는 거죠. 벌써 우리나라만 해도 60~70년대부터 왠지 그러지 않으면 윤리적으로 나쁜 사람처럼 느끼게 되는 거 있죠. 60~70년대 이후에 어느 순간부터 우리 사회에서 “일 안 하는 자는 굶어야 하고, 먹지도 말라. 그러면 게으르고 나쁜 사람이니까”라고 말해요. 뚱뚱하면 자기관리 안 되는 사람. 날씬해야 하고, 자기 몸도 잘 관리해야 하고, 나이보다 젊어 보여야 하고, 운동해서 깔끔해야 하고, 그러면서 일도 잘 해야 하죠. 그런 것들을 다 내가 나를 관리했기 때문에 만들어진 결과물이라 생각하게 된 거죠. 그런데 그것들이 진짜 나의 노력으로만 된다는 것은 환상에 불과해요. 그러다 보니까 우리가 사는 게 점점 힘들어지지요.

 

 

매뉴얼이 없는 사회

 

 

그래서 변화를 바라요. 우리가, 세상이 힘들고 불확실하니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요. 그때 우리가 바라는 건 두 개예요. 하나는 메시아가 오길 바라는 거예요. 왕이 있거나 아니면 신이 있거나 누군가가 와서 딱 이렇게 하라고 지시를 주면 좋을 것 같죠. 머리 복잡하지 않게, 강력한 지도자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심지어 히틀러 같은 사람이 오더라도 말이지요. 우리 사회도 대통령만 잘 뽑으면 모든 게 해결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아요. 대통령이 잘못했으니까 사회 문제가 생겼다고 믿고 싶은 것이지요. 두 번째로는 매뉴얼이 있었으면 하는 건데 우리 세월호 참사 때도 그랬지만 재난 대비 매뉴얼이란 게 없었다고 얘기하잖아요. 회의만 한다고요. 매뉴얼이란 게 있으면 갑자기 일이 생겨도 거기 쓰여 있는 대로 하면 돼요. 요리도 레시피가 있으면 한 몇 번만 해보면, 요리사가 한 거랑 비슷하게 만들어 낼 수 있어요. 기적 같은 일이 아니라, 그 요리사가 매뉴얼을 만들어 둔 거거든요. 그게 근대 사회인데 우리나라는 지금 두 가지가 다 없는 거죠.

그러면서 다 개인에게 요구해요. 네가 선택하라고 하죠. 그러면 개인이 하루에 선택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아져요. 학교 가면 식단표가 있고 쭉 보면서 예측할 수 있잖아요. 예측이 가능하면 “오늘은 맛없겠구나, 오늘은 아침을 많이 먹고 가야지”라고 판단하거나 간식을 준비해갈 수도 있어요. 그런 식으로 선택을 안 하면 우리 머리가 덜 복잡한 거죠. 어떤 면에선 교복도 편한 면이 있는 거죠. 오늘 무엇을 입을지 고민하지 않고 교복을 그냥 입고 다니면 되니까요. 이런 거 하나하나에 대한 선택과 그 선택의 실패에 대한 책임을 모두 지라고 한다는 게 일견 폭력적인 면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굉장히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고 날 지치게 해요.

 

 

실패가 용납되는 사회를 꿈꾸며

 

 

우리 사회가 갖는 또 다른 특징 중 하나는 한 번의 실패 이후에 재기하는 게 매우 어려운 사회라는 거예요. 사실 넘어지지 않고 자전거 배울 수 없잖아요? 자전거 타려면 한두 번은 넘어져야 하잖아요. 그래야지 위험한 것도 알고요. 근데 딱 한 번 넘어졌다고 넌 다신 자전거 타지마, 이렇게 되는 사회 같아요. 그래서 우리 사회가 우리가 모두 그런 태도를 가져서, 실패가 용납되는 사회가 됐으면 좋겠고 다시 기회가 주어졌으면 좋겠어요. 실패가 도리어 훈장같이, 경험같이 여겨지는 사회가 되면 더 좋겠습니다. 타석에 여러 번 서 볼 수 있고, 여러 번 기회를 얻을 수 있고 그래야 진짜 바라는 게 뭔지 알 수 있으니까요. 그래서 저도 계속 쓰고 있어요. 실패를 경험하면서. 그렇게 다양한 책들을 쓰니까 각기 다른 책들에 대해서 여러분처럼 다양한 질문하는 사람도 생겨나는 것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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